매일신문

[야고부] 최욱경

한 20여 년 전, 당시 대구시내 중앙공원(현 경상감영공원) 인근 한 커피숍에서의 기억이 새삼스럽다. 가수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함직한 수수한 분위기의 그곳에서 벽에 걸린 그림 한 점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100호쯤 됐을까, 꽤 대작인 걸로 기억되는 그 작품은 주황, 빨강, 하늘색 등 강렬한 색채와 열정적인 붓놀림으로 보는 이에게 충일한 생명력을 느끼게 했다. 화가 최욱경(1940~1985)의 작품이었다. 상업화랑으로는 대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맥향화랑 측이 한때 경영했던 인연으로 그 커피숍에서 그녀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생전의 최욱경과 교유했던 화가 이명미 씨는 최욱경을 매우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감성의 소유자라고 말하곤 했다. 어느 비 내리는 날, 식당 창가에 앉아 있던 최욱경은 갑자기 눈물을 떨어뜨렸다. 의아해 하는 이씨에게 최욱경은 "비가 오잖아"라고 했다.

서울대 미대를 나와 미국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최욱경은 불꽃처럼 살다 간 예술가였다. 한국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한 획을 그을 만큼 개성 넘치는 작품들을 남겼나 하면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낸 시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화려한 경력과 걸출한 작품세계를 뒤로 한 채 45세로 돌연 타계한 것은 한국화단에 충격적인 일이었다. 한때 영남대에서 교수로도 활동했던 터라 지역 문화계에도 적지 않은 애석함을 안겨주었다.

유택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최욱경이 난데없이 시끄러운 세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어 안타깝다. 전군표 전 국세청장과 한상률 현 국세청장 간 '청탁성 뇌물' 의혹 사건 한복판에 그녀의 작품 '학동마을'이 놓여져 있는 것이다. 최욱경이 죽기 1년 전에 그린 작품이라는데 비상하는 鶴(학)을 특유의 현란한 색채와 빠른 붓놀림으로 표현한 8호 크기다. 추정가는 3천, 4천만원에서 5천만원까지 오르내린다.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이 재작년 초 당시 한상률 국세청 차장에게서 인사청탁과 함께 받았다는데 막상 전'현직 두 사람은 그런 일이 절대 없다고 펄쩍 뛰고 있다. 그림을 받은 사람은 있는데 준 사람은 없는 기이한 사건이다. 자기 작품이 느닷없이 '뇌물 그림' 사건에 휘말려 있는 걸 최욱경은 알고 있을까.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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