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순재의 여담女談] 집 멀미하는 아내, 집 지키는 남편

역전의 순간은 어느날 문득 찾아온다. 집에만 있던 아내는 집을 비우기 시작하고, 집을 잠자는 곳쯤으로 여기던 남편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여성 호르몬이 적어진 아내는 겁없이 남편에게 대들기 시작하고 , 남성 호르몬이 줄어든 남편은 젖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찰싹 달라 붙는다. 남편의 퇴직과 함께 찾아온 부부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조기퇴직이다 명퇴다 해서 직장을 접는 남편들이 많아지면서 부부가 겪는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처음에는 측은하기도 하고 그 동안의 고생이 고마워 남편의 짜증도 받아주고 외출도 삼가던 아내가 한,두 달이 지나면 집에만 있는 남편을 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집에서 한끼만 먹던 '일식씨' 남편이 어느새 '삼식새끼'가 되고, 잔소리까지 시작하면 영락없이 후줄근한 노인 취급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불만이다. 아내 눈치 보랴 자식 눈치 보랴 그렇게 구차스러울 수가 없다. 아내는 무엇이 바쁜지 남편은 뒷전이고 자식에게도 말 한마디 건네기 쉽지 않다. 강아지도 집안의 실세를 알아보는지 아내만 들어오면 꼬리를 친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자신의 삶이 한없이 한심해 보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하루종일 TV채널만 돌리고 있을 뿐이다.

아내는 집 멀미라도 나는 양 밥만 먹으면 밖으로 나간다. 이것을 배운다, 저것을 배운다며 하루 종일 나다니고 그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만나느라 약속이 이어진다. 그래서 주부를 위한 각종 문화 강좌는 새벽 4시부터 줄을 서야 되고 낮시간의 고급 음식점들은 주부들로 가득하다. 각종 기관들은 주부들의 이러한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앞다투어 다양한 강좌를 마련하고 있으나 남편들을 위한 강좌는 어디에도 없다. 한 구청 관계자는 " 조기 퇴직자가 많아져 남성들을 위한 강좌가 필요하나 남성들의 참여가 너무 없어 검토만 하는 단계"라고 설명한다.

왜 집만 지키느냐는 물음에 남편들도 할 말이 많다. 피로하단다. 지금까지 직장 생활하면서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왔으니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다는 것이다. 배신감도 만만치 않다. 마치 간이라도 빼줄듯하던 거래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태도를 달리 하는 양을 보면 도무지 사람이 싫어진단다. 퇴직이 곧 낙오자라는 참담함도 밖으로 나가려는 남편들의 발목을 잡는다.

어느 날 찾아온 남편의 퇴직. 그 앞에서 아내와 남편은 모두 힘들다. 수명이 길어지고 조기 퇴직이 보편화된 지금 행복한 노후를 위해서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남성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수십년 간 갈고 닦은 그들의 능력을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퇴직한 남성들이 재충전을 통해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도록 각종 남성 강좌도 있어야겠다. 이것이 실업급여 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