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재학의 시와 함께] 「賦得燈前菊花影(등불 앞 국화그림자를 서술하다)」/ 이학규

燈在菊南花影北 국화 남쪽 등불에 꽃 그림자는 북

燈在菊西花影東 국화 서쪽 등불에 꽃 그림자는 동

一牀書帙兩壺酒 책상 책갑에 술병 둘

徧 要看渠花影中 둘러보니 이 모두 꽃 그림자 속

주자학의 세계에서 사물을 노래한 영물시는 사물 속에서 삶 전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학규의 시에서 삶에 대한 언술은 희미하다. 사물 뒤로 철저하게 숨어버린 현실 혹은 표백화되거나 희석된 사물의 풍경만이 모노크롬에 의지해 표면에 솟아난 셈이다. 장소는 선비의 방. 그 방의 풍경이 배경이자 묘사 주체이다. 주인을 기다려온 국화 화병과 등불이 서로 껴안거나 외면하듯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화자의 시점은 성큼 방 전체를 그리더니 그 모두를 꽃 그림자가 삼키게 만든다. 화자는 방 구석에서 등불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통해 내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내면조차 책상이나 책갑, 술병, 국화와 마찬가지로 등불에 일렁이는 사물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蟲也瓦也吾 苦無才與技 腹有氣烘烘 大與人殊異(벌레가 나고 기와가 날세 재주도 기술도 너무나 없네 뱃 속에는 불 같은 기운만 있어 여늬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네)" 「蟲也瓦也吾」라는 이덕무의 시보다 근대적 자아에 더 가까이 다가간 이 시의 근대성은 조선 한시사가 근대 문학사와 매듭 없이 이어질 수 있다는 예감을 준다는 점에서 되풀이해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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