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11일, 경북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 '인민군이 동네 근처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동요했다. 기계천 북쪽 수북지역(안계, 양동, 단구, 다산) 주민들이 피난을 준비했다. 그러나 강동면 경찰지서에서 '아군이 곧 반격할 것이니 동요하지 말라'며 길을 막았다. 주민들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비상연락망을 구축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12일 새벽 인민군들은 단구, 다산, 안계는 물론 유금과 양동리 뒷산까지 내려왔다.
주민 200여명은 피난길에 나섰다. 기계천에 이를 즈음 국군이 '전투가 곧 시작되니 통행을 차단한다'고 했다. 피난민들은 기계천 제방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빠졌다. 이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이들은 초조한 심정으로 13일 아침을 맞았다. 오전 7시쯤 미군 정찰기 한 대가 강동면 상공을 20분가량 선회하다 사라졌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 미군 비행기 5, 6대가 날아왔다. 피난민들은 인민군을 격퇴하러 온 비행기로 알았다. 어른들은 수건을 머리 위로 휘둘렀고,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비행기는 갑자기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 사격을 맹렬히 퍼부었다. 비명소리가 제방을 흔들었다. 아비규환이었다.
#1950년 9월 1일 오후 포항읍 여남동(현 포항시 북구 환여동) 송골해변. 피난민 수백명이 모여 있었다. 포항 앞바다에 미군 군함이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안전하다'고 여겨 몰려든 것.
오후 2시쯤 갑자기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왕좌왕했다. 이때 미군 정찰기 1대가 날아와 해변 상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닷가 쪽에서 불이 번쩍했다. 귀를 찢는 듯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군함의 포 소리였다. 함포사격은 계속됐다. 무자비한 폭격이었다. 해변은 쑥대밭이 됐다. 부딪히고, 쓰러지고, 달렸다. 신음소리가 여기저기 들리고, 시체가 나뒹굴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59년 전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약 100만명(한국전쟁유족회 추정)의 억울한 희생자 유족과 부상자들의 한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 군경이나 미군에 의한 희생에 대해 군경 당국이나 미국의 공식적인 사과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지난 2005년 12월부터 진실규명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이원우(61·대구시 동구 신서동)씨는 법적으로 본인 이름이 없다. 지금까지 형 이름을 쓰고 있다. 이씨는 경주 안계리 미군 폭격으로 아버지, 어머니, 형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호적등본이 필요해 면사무소에 갔더니 자신의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았다. 난리 통에 21개월 된 자식의 출생신고를 할 여지가 없었던 것.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할 형편이었다.
이씨는 지난 2002년부터 경주시, 행정자치부, 국방부 등지에 진실규명을 요청하는 민원을 수차례 냈다. 경주시와 행정자치부의 답변은 국방부로 사건을 이첩했다는 것. 국방부는 '50여년이 지나 물증확보가 어렵고, 미군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사실을 입증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니 양해해 달라'고 했다.'미국 문서보관소 등 자료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록이 확인되면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분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시점에서 벌써 7년이 지났다. 지난달 직접 방문조사를 벌인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 활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
방일조(70·포항시 연일읍)씨는 열한 살에 아버지와 남동생을 잃었다. 포항 송골해변 미군 함포사격 사건 당시 '마을로 도망가라'는 아버지의 외침에 어머니, 누나, 막내 동생과 함께 겨우 목숨을 건졌다. 방씨는 지금도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치고 있다.
◆경북지역 미군 관련 희생
지역 미군 관련 희생사건은 경주, 구미, 김천, 영덕, 영주, 영천, 예천, 청송, 울릉 등지를 망라한다. 진상규명을 요청한 유족들의 주장을 감안하면 미군 폭격이나 총격에 의한 희생자는 수천명에 달한다. 약 40건의 진실화해위 신청사건 중 포항 흥해읍 흥안리, 예천 보문면 산성리 등 2건만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진 상태다.
경주 강동면 안계리 미군 폭격 사건의 경우 지난달 조사관들의 현장조사가 이뤄졌고, 현재 구미 형곡동 사건에 대한 현장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방대한 사건분량에 비해 조사인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경북지역 미 공군 희생사건을 맡은 진실화해위 김응학 조사관은 "접수 건수가 많은데다, 실제 조사를 하면 희생자 규모나 유족들이 신청 때보다 크게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김 조사관은 최근 포항, 구미 등 사건 현장에서 유족면담, 목격자 증언 청취 등 연일 밤늦게까지 조사를 벌이고 있다.
또 '진실규명' 결정이 나더라도 '유족에 대한 공식 사과, 경찰과 공무원에 대한 평화인권교육, 위령사업 지원' 등을 국가에 권고하는 선이다. 배상이나 보상, 공식 사과에 대한 직접적인 권한이 없는 것이다.
◆멀고도 험한 미군 관련 희생 규명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건은 미군 관련 건을 비롯해 크게 8개 단위로 구분된다. 보도연맹, 군경, 여순, 제주 예비검속, 부역관련, 대구 10월사건, 형무소 관련사건 등이다. 현재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진실규명 신청 건수는 7천500여건. 이 가운데 미군 관련 희생사건은 모두 511건이다. 대구·경북 미군 관련 희생사건은 약 40건. 미군 비행기에 의한 폭격이 대다수이고, 함포사격도 있다.
미군 관련 사건의 경우 국내 자료와 현장조사는 물론 미군 문서조사까지 필요해 다른 사건에 비해 그만큼 힘들다. 특히 국가 간 문제로 희생자 유족에 대한 공식적 사과, 배상이나 보상이 이뤄지기가 훨씬 더 어렵다.
◆해결책은?
한국전쟁 희생자 유족들은 ▷희생자 전모 파악과 진실 규명 ▷당국과 미군의 사과와 반성 ▷피해자 배상·보상 관련 특별법 제정 ▷희생자 추모 지원 등을 요구하고 있다.
조동문 한국전쟁유족회 사무국장은 "진실화해위에서 조사하고 있는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다. 진실규명 신청접수자 위주로 조사하다 보니 희생자 수나 전체적 피해규모가 호도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조 사무국장은 "억울한 희생을 당하고도 신청을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1960년 4·19 이후 정부는 국회청원을 통해 한국전쟁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일부 희생자 유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러나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정권은 유족회 결성에 앞장섰던 사람들을 찾아내 탄압하고, 심지어 구속까지 시켰다. 그때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유족들은 지금도 진실규명 신청을 꺼리고 있다. 정부가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에 대한 강력한 의지가 있다면 모든 유족들이 진상규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터줘야 할 대목이다.
조 사무국장은"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유족에 대한 위로도 중요하지만, 당국이 철저한 반성을 포함해 역사적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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