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기는 독도] 역사⑥-안용복 2차 度日

▲ 서도 어업인숙소에서 물골로 넘어가는 나무계단이 봄철 낙석으로 크게 파손되었으나 지난달 27일부터 공사인부 7명을 투입, 보수공사를 마무리했다.
▲ 서도 어업인숙소에서 물골로 넘어가는 나무계단이 봄철 낙석으로 크게 파손되었으나 지난달 27일부터 공사인부 7명을 투입, 보수공사를 마무리했다.

'역사를 빛낸 노비, 안용복' 안용복의 첫 번째 일본행이 피랍이었다면 두 번째 도일은 스스로 건너간 것이다. 그는 일본행에서 목숨을 위협받으며 모진 옥고를 치렀다. 그러고도 3년 후 두 번째 도일을 감행했다.

숙종 22년(1696년) 3월 18일. 안용복은 순천의 상승(商僧) 뇌헌(雷憲)의 배로 일행 10명과 함께 울산포를 출발해 당일 울릉도에 도착했다. 문헌은 안용복이 모친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울산에 가서 뇌헌을 만나 '울릉도에는 해산물이 풍부하다'고 설득해 울릉도로 건너갔다.

이후 2개월이 지난 5월 15일, 울릉도에 월경(越境)한 일본인들을 만나 "울릉도는 본래 조선 땅인데 왜인이 어찌 감히 침범하는가"라고 일갈한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우리들은 송도(자산도·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안용복은 "송도는 곧 자산도인데 이 역시 우리 땅이다. 너희들이 감히 어떻게 여기 산다고 하느냐"고 말하고, 이튿날 새벽 자산도에 들어가 보니 일본인들이 솥을 걸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었다. 이에 막대기로 이를 부수고 큰 소리로 꾸짖으니 일본인들이 모두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사료는 기록하고 있다.(숙종실록)

안용복은 다시 이들을 쫓아 5월 18일 아침 은기도(隱岐島)에 들어갔다. 은기도주가 일본에 온 이유를 묻자 "몇 년 전 내가 이곳에 와서 울릉·자산 등의 섬을 조선 땅의 경계로 정하고 관백(關白)의 서계까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정식(定式)도 없이 경계를 침범하니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라고 따지고, 이런 사실을 소원(訴願)하고자 백기(伯耆)로 가는 도중에 들렀다고 말했다.

또 이 때 조선팔도지도를 꺼내 울릉도와 자산도가 강원도에 속해 있다고 지도에 표시되어 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는 은기도에 상륙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 22일부터 민가에 들어 소장 초안을 완성했다.

6월 4일에는 '조울양도감세장신안동지기(朝鬱兩島監稅將臣安同知騎)'라고 쓴 깃발과 '배꼬리에서 일어나 무성히 자란 벼를 바라보니 다시 돌아갈 고향의 농사철이 생각나네'란 싯귀를 적은 깃발을 날리며 백기의 적기(赤崎)에 배를 댔다.

다음날 안용복 일행은 백기에서 보낸 선박의 안내를 받아 청곡진(靑谷津)으로 들어간다. 정박할 당시 다옥구조(茶屋九助)란 사람이 기록한 '선험(船驗)의 도(圖)'란 문서에 따르면 배의 표지와 싯귀를 적은 깃발이 그려져 있고, '…조울 양도는 울릉도(일본에서 이를 죽도라고 일컫는다)·자산도(일본에서 송도라고 부른다)이다. 그 때의 선장을 안동지라고 부른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곳에서 안용복 일행은 외교사절로 행사하면서 동행한 진사군관 이 비장(李 裨將·이인성)이 8장의 휘호를 남기기도 했다. 이에 백기에서는 고위 관원을 보내 극진한 접대를 하면서, 숙소를 성(城) 아래에 정해, 가마 2채와 말 9필을 보내 일행을 맞아들이고 통역인을 배치하기에 이르렀다.

6월 21일 안용복은 청첩리(靑帖裏·관복)를 입고 검은 갓과 가죽신으로 위의(威儀)를 갖춘 채 이 비장과 가마를 타고 다른 사람들은 말을 타고 백기 성내로 들어갔다. 집정소에 도착한 안용복은 부태수(당시 안용복은 태수로 알고 있었음)와 마주앉고 나머지는 단 아래에서 중신들과 대좌했다.

이 때 부태수가 일본에 온 이유를 묻자, '전날(3년 전) 두 섬의 일로 (막부가 써준) 서계를 받아내었음이 명백한데 대마도주가 빼앗고 중간에 위조하여 수차례 사절을 보내 불법으로 침범하고 있으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일일이 밝히고자 한다'고 대답했다.

이에 부태수가 허락해 이인성 등과 은기도에서 작성한 소장(訴狀) 초안을 건네주어 관백에게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천민인 노비의 몸으로 일본 막부와 직접 담판에 나선 안용복. 결국 한 천민의 결기가 울릉도·자산도를 우리 땅으로 쐐기 박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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