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역사가 꽃폈고,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 온 상주는 그 명성에 걸맞은 학문의 고장이었다. 영남의 으뜸 고을 상주는 학문도 으뜸인 곳이었다.
조선 유학의 뿌리이자 퇴계를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 최후의 보루가 바로 상주였다. 또한 상주의 학문은 열려 있었다. 학문 수양에 '너와 나'가 없었고, 계파를 초월해 학자적 양심만이 상주 땅에 유유히 계승되어 왔다. 바로 상주인의 자부심이 아니겠는가.
상주의 명승지인 경천대 앞 낙동강변을 따라 차로 10여분을 달리면 낙동강에 맞닿은 자리에 '잘생긴 고건축물'이 눈에 꽉 찬다. 여름 뙤약볕에 흘린 땀만 한 바가지이지만 시원스럽게 펼쳐진 낙동강의 경치와 강바람에 무더위가 한 풀 꺾었고, 강 풍광을 발 아래 둔 고건축물에 무더위는 단박에 달아나 버렸다.
일행이 찾은 이 고건축물은 바로 상주 학문의 정신인 도남서원이다. 서원의 모습이야 어느 고을을 가든 엇비슷하지만 어찌 겉모습만 보고 서원의 진면목을 알겠는가. 상주의 정신을 찾기 위한 그 출발선으로 도남서원을 선택했다.
도남서원은 상주 최초의 서원(1606년·조선 선조 39년 창건)이자 중심 서원이었고, 영남 땅에선 '영남 제1의 수학궁(首學宮)'으로 걸출한 조선 선비를 길러냈다. 또 상주 땅에는 조선 말 서원이 철폐되기 전까지 18개의 서원과 13개의 사단(祠壇)이 운영됐고, 그 정점에 도남서원이 있었다. 일행은 도남서원의 중수기를 살폈다. 중수기는 "우리나라 선비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학파의 주체 세력은 상주의 인물이었다"고 적었다.
서원의 한가운데 건물에는 위패를 모시고 있었다. 유학을 대표하는 다섯 분의 위패가 정면에 엄숙히 자리했다. 좌로부터 제1위인 포은 정몽주를 비롯해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을 모셨다.
특이한 것은 제1위 신위로 모신 정몽주다. 정몽주는 조선의 대유학자가 아닌,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충절의 표상인 충신이다. 한국 유학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문묘종사 5현에는 정몽주가 없다. 문묘종사 5현을 모셨다면 정몽주 자리에 정암 조광조 신위가 위치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뜻하겠는가. 곽희상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포은을 모셨다는 것은 상주인의 열린 학문과 영남 유학의 정통성을 잇기 위한 자세"라며 "학문에 고려와 조선을 따지지 않은 것이요, 이는 학자적 양심"이라고 해석했다.
도남서원은 영천 출신의 정몽주를 시작으로 김굉필→정여창→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영남 유학의 정통성을 상주 학문의 정신으로 삼은 것이다.
일행은 도남서원을 나서 상주 학문 기행에 나섰다.
조선의 조정은 학문과 당파가 무관하지 않았다.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는 융화되지 않았다. 지역도 달랐고, 학문적 차이는 조정에서도 서로 다른 정치 이념을 낳았다. 하지만 영남 땅 상주에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공존했다.
상주의 영남학파는 서애 류성룡이 상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상주는 명실공히 영남학파의 대표 고을로 우뚝섰다. 서애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 수암 류진, 월간 이전, 창석 이준 등 내로라하는 대유(大儒·대유학자)를 배출했고, 상주만의 독창적인 학파를 형성했다. 우복 정경세는 상주 학문의 가장 큰 어른이다. 형조·이조·예조판서와 대제학, 대사헌을 두루 거쳤고, 도남서원 창건의 중심 인물로 도남서원에 모셔졌다.
창석은 우복과 더불어 퇴계와 서애의 학통을 이은 큰 선비였고, 상주의 향토지인 '상산지'를 최초로 편찬했다. 그 역시 도남서원에 배향됐다.
율곡 이이의 학맥인 기호학파는 영남 땅에선 그리 반갑지 않은 학문이었다. 퇴계와 남명 조식의 학문으로 대표되는 영남학파에 기호학파가 뿌리를 내리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하지만 상주 땅에는 기호학파가 자리했다.
상주의 기호학파는 창령 성씨 가문이 주춧돌이었다. 특히 청죽 성람은 현존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의료국인 존애원(상주 청리면)의 주치의로 우복, 창석 등과 교우했다. 또 우복의 사위는 동춘당 송준길로 기호학파였다. 당시 상주 땅에서 당색을 초월한 학문적 교류가 이뤄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상주목사에는 기호학파가 주축인 서인계 인물이 많았지만 이들 역시 영남 땅 상주의 선비들과 별다른 정치적 마찰없이 교우했다.
현재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는 정경세의 우복종가가 있고, 상주 퇴계학의 큰 스승인 수암 류진의 수암종택이 중동면 우물리에 자리하고 있다. 또 상주 시내에는 율곡 이이의 기호학을 장려한 흥암서원이 있다. 흥암서원은 동춘당 송준길을 기리고 있다.
뭘 뜻하는 걸까. 지금도 열린 학문의 고장 상주를 널리 알리고 있는 것이다.
상주는 영남학파의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유학이 조선에 들어온 지 4백년이 지난 18세기 후반 정조 때부터 조선 말까지는 실학의 시대였다. 사상의 대변혁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천주교가 들어와 종교적으로 유학과 대립했고,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는 등 시대적 혼란기였다.
영남학파의 '최대 위기'때 상주는 가학(家學)으로서 영남학파의 맥을 마지막까지 계승한 고을이었다.
풍양 조씨 가문의 구당 조목수와 가은 조학수, 연안 이씨의 강재 이승연과 임하 이경유, 의령 남씨의 손재 남한조, 진양 정씨의 입재 정종로, 풍산 류씨의 강고 류심춘과 계당 류주목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묵묵히 상주와 가문을 지키며 후학을 양성하고, 가문의 학통과 영남학파의 정통성을 조선의 마지막까지 이어온 선비들인 것이다.
입재 정종로는 당대 영남 제1의 선비로 칭송받았고, 퇴계→서애→우복 등으로 이어지던 학통을 받아 '우산학파'를 형성했다. 또한 류심춘 등 248명의 제자를 길러낸 종사(宗師)였다. 손재 남한조는 입재와 더불어 당대 상주 유학의 쌍벽을 이뤘고, 계당 류주목은 가학인 우천학(퇴계→서애→류진→류심춘)을 이어 영남학파의 종사가 된 선비다.
일행은 안동을 취재하던 당시 "안동 땅의 제대로 된 학자 하나가 과거 급제 선비 100명보다 낫다"는 안동 사람들의 자부심을 익히 알고 있다.
상주 땅 역시 오로지 학자적 양심을 지키고, 학문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선비들이 즐비하다.
'퇴계의 학풍을 이었다', '서애의 제자였다'는 등의 사실도 중요하지만 이제 상주만의 독자적 학문 가치를 상주 스스로 찾아 상주의 정신을 널리 알려봄이 어떨까. 영남 땅 상주가 영남학파의 으뜸 고을이면서도 기호학을 수용한 사실도 더더욱 상주의 자랑이 아닐까.
이종규기자 상주·이홍섭기자 사진 윤정현
자문단 조희열 상주향토문화연구소장 곽희상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강경모 상주향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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