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들은 왕(덴노)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1853년 미국 페리 함대가 문호개방을 요구하자, 다급해진 幕府(막부)정권은 왕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핑계를 댔다. 그제서야 일본인들은 왕의 존재를 알게됐다.
1867년 親(친)막부파와 倒幕(도막)파 간 싸움의 와중에 고메이(孝明)왕이 갑자기 사망했다. 그가 친막부'쇄국적 입장을 갖고 있었기에 도막파의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후궁 소생인 15세의 무쓰히토(睦仁)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메이지(明治)왕이다.
다음해 막부가 무너지면서 왕정복고와 함께 메이지유신이 일어났다. 어린 왕은 유신세력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거처를 소박한 교토성에서 큼직한 에도(도쿄)성으로 옮기고 신격화되기 시작했지만 막부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했다. 왕이 위엄을 발휘할 때도 있었으나 정부 고관들은 여전히 왕을 장기판의 말 정도로 여겼다.
일본의 군국주의화는 양복으로 갈아입은 무사들이 주도했지만 통치자인 메이지왕의 책임도 크다. 59세였던 1912년 오늘,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재위 중 우리 민족은 '한일합방'이라는 크나큰 치욕을 겪었기에 미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박병선 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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