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 사랑, 예찬
백발은 모두들 늙음으로 인식하여 싫어한다. 그런데 이런 백발을 자랑스럽게 휘날리고 있는 이들이 있다. 관록과 여유, 자연스러운 멋까지 함께 풍기면서 말이다. 당당하다. 자신감으로 노년을 살아가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여기다 백발은 편리할 뿐 아니라 외국에 나갔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단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오히려 경쟁력이 더 있다나. 백발을 휘날리며 현장에서 당당하게 일하는 이들을 만나서 백발 예찬을 들어봤다.
조해녕(66)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공동위원장. 그는 지난해부터 오랫동안 해오던 머리 염색을 그만두었다. 멋진 은발로 대구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다. TV에도 자주 등장한다. 브라운관에 모습이 비쳐지면서 최근 인사 전화를 많이 받고 있다. 그런데 전화 내용의 끝은 '염색을 하는 것이 젊어보이고 좋지 않으냐'는 부드러운 권유가 대부분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그는 웃고 넘긴다. 염색할 생각이 없고, 자연스러운 흰머리가 편하고 좋기 때문이다. 물론 '관록이 있어 보인다' '오히려 멋있다'는 찬사도 그의 백발 고집에 한몫한다.
부인 김옥희씨는 "머리가 빨리 하얗게 돼서 일찍부터 염색을 해왔다. 그러던 것이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가식을 싫어하는 성격답게 백발을 고집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도 염색을 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많이 듣고 있는데 물러설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조해녕 위원장은 "최근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에 갔을 때, 오히려 백발이 외국인과 잘 어울리는 데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며 "이제는 자연의 이치를 닮아 그 모습 그대로를 아름답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영화배우 신성일(71)씨는 '베토벤 머리'로 세인의 주목을 받아온 터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뇌물 수수로 구속됐을 당시 베토벤의 전기를 읽다 베토벤에 매료돼 머리 스타일도 아예 베토벤 머리로 바꿨다. 주변에서 파마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리도 듣지만 그는 베토벤 스타일에 완전히 '필'이 꽂혔다.아주머니들이 "백발이 정말 잘 어울린다. 우리 남편도 저렇게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감옥소 갔다와야지 할 수 있는 머리야.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안 어울려.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래서 주위를 웃음바다로 만든다. 말하자면 인생에 대해 '뭘 좀 알아야' 백발 그대로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대구경북연구원의 홍철(64) 원장도 지난해부터 하얀 머리로 다니고 있다. 홍 원장은 "처음에는 아내의 반대가 심했다. 늙어보인다며 싫어했는데 지금은 포기 상태"라고 말한다. 오히려 백발을 반대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한다. 홍 원장은 우선 편리함을 들었다. 염색은 10일 만에 해야 하고 오랫동안 염색을 하니 눈도 침침하고 가려워 자연스럽게 백발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인천대학 총장 시절 잠깐 백발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때는 교수들과의 기싸움도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나이들어 보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제는 기 싸움도 다 부질없는 것이고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최영은(56) 대구예총 회장도 백발이다. 멀리서 보면 노인 같다며 주변에서는 걱정이다. "염색을 하면 10년은 젊어보일 수 있는데"라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백발의 좋은 점도 많다고 한다. 그는 "염색을 자주 할 만큼 부지런한 성격도 못 되고 주변에서 예술가의 분위기가 난다는 덕담도 있어 그냥 자연스럽게 백발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그런데 가끔은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상대방보다 나이는 젊은데 백발로 앉아 있기가 우리의 정서상 조금은 부담스럽다는 이유다. 그래서 살짝 스프레이를 뿌리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백발이라면 끔찍해 할 것 같은 여성들도 하얀머리로 멋을 부리고 있다. 문화활동을 하는 조모(61)씨는 50대 중반부터 염색을 하지 않고 하얗게 해다니고 있다. 처음 염색을 하지 않았을 때는 '병에 걸렸다' '몸에 이상이 있다더라'는 등 별의별 소문이 떠돌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나이보다 젊어보인다는 소리를 더 많이 듣는다고 자랑한다.
조씨는 "오히려 백발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미용사의 권유를 받고 그날로 염색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이래 봬도 한번도 할머니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백발이 되면 당연히 할머니 소리를 더 많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할머니 소리 대신 '여사님' 소리를 듣는다며 뭔가 깊이가 있어 보이는 모양이라며 웃는다.
오히려 남의 눈에 잘 띄어 쉽게 기억해 주고, 보기보다 젊다는 소리를 더 많이 듣는다고 백발 예찬이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당당하게 나이를 먹어간다는 느낌이 가장 즐겁게 만든다고 한다.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 심정이란다.
미국 낭만파 시인 롱페로우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젊은이들보다 기회를 덜 가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이다. 저녁의 황혼빛이 사라지면 하늘은 낮에 볼 수 없었던 별들로 가득 찬다'고 나이듦을 예찬했다.
백발 예찬론자들은 단지 다른 옷으로 갈아 입었을 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당당함을 얻었다고 자랑이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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