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능동·천황·재약산 억새 산행

가을은 은빛 물결 속에 내려앉았네

"바람에 날카로운 날을 세우지 말고/ 부러지지 않을 만큼 고개 숙여 바람의 길을 열어주라고/바람도 억새꽃을 꺾지 않는다." 어느 무명시인의 노래처럼 바람과 억새의 아름다운 동행에 몰입하고 싶은 계절이다. 벼과의 다년생풀인 억새는 한반도 전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강원도 민둥산, 유명산, 장흥 천관산 억새는 이미 명품 반열에 올라있다. 근교엔 없을까? 영남알프스의 산군들은 전국 최고의 억새군락지로 내놓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간월·신불산, 천성산과 억새 3각점을 이루는 능동·천황·재약산의 억새물결 속으로 떠나보자.

◆ 영남알프스 동서 가르는 분수령

'굽히지만 꺾이지 않는' 억새의 처세 미학을 화두로 삼아 배내고개에 발걸음을 내딛는다. 배내고개는 영남알프스의 동서(東西)를 가르는 분수령. 이 재를 기준으로 동쪽으로 간월·신불·취서(영취)산이, 서쪽으로 능동·천황·재약산이 산맥을 이루며 펼쳐진다.

첫 기착지인 능동산(983m)은 서(西)알프스의 관문이며 7개 산군의 요충지. 배내고개는 자체로 750m에 이른다. 이미 8부 능선은 올라있으니 반(半)은 접어논 셈이라고 치부하다간 30도를 넘나드는 가파른 경사에 혼쭐이 나기 일쑤. 능동산 오르막길 등산로엔 도토리가 지천이다. 등산을 2순위로 미루고 아예 도토리투어로 일정을 변경한 분들도 눈에 띈다. 발끝마다 채이는 게 도토리니 다람쥐 먹이 걱정은 안해도 될 듯하다. 능동산 표지석과 가볍게 스킨십을 하고 천황산 쪽으로 진행한다.

1시간여를 걸어 샘물상회에 이르렀다. 커피 한잔에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는다. 상회 주변의 야생화에 흠뻑 빠져 있는데 주인 정지홍씨(58)씨가 채소를 한아름 안고 나타났다. 등산객들을 위한 조리용인 듯.

배내고개에서 뻗어온 임도는 샘물상회 앞에서 끊어진다. 이제부터 본격 등산모드로 전환한다. 천황산까지는 가파른 능선을 타야한다. 산등성이엔 막 홍조를 띤 단풍들이 부지런히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밀양 얼음골 쪽 풍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들녘엔 벼들이 황금 카펫을 펼치고 마을 어귀 감나무엔 노란 점들이 알알이 박혀있다.

◆ 천황산 능선따라 하얀 억새 군무

얼음골 삼거리를 지나 천황산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순간 시선을 잡아끄는 은빛물결의 파노라마. 억새였다. 군집(群集)의 미학이 가장 빛을 발한다는 억새밭. 가을을 채색하는 하얀 진객들의 군무가 황홀하다. 은색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햇살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가을하늘과 공명(共鳴)한다.

이곳 억새들은 키가 작다. 기껏 어른들 허리춤을 간지를 정도. 봄에 새싹이 돋을 때 묵은 갈대들이 햇빛을 가려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 억새 태우기나 겨울철 제초작업을 이제 생태 차원에서 고려할 때가 됐다.

천황산 정상석을 찍고 표충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재약산과 맞닿아 있는 천황재 평원이 수채화처럼 펼쳐졌다. 가르마 같은 억새길을 따라 등산객들의 유쾌한 발걸음이 가볍다. 아빠를 따라나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연인들의 유쾌한 수다가 억새 속으로 맑게 울려 퍼진다.

천황재에서 가파른 길을 20여분쯤 오르면 그 유명한 재약산에 이른다. 약초(藥)를 재어(載) 놓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됐다. 신라 흥덕왕 때 왕자가 이곳에서 지병을 치료했다는 전설이 있고 동의보감의 허준도 여기서 스승 유의태 해부를 집도했다고 전한다.

◆ 125만평 사자평에 깃든 사명대사 호국혼

재약산이 명산으로 부상하는데 숨은 공신이 있다. 바로 산 아래 그림처럼 펼쳐진 사자평이다. '사자가 뛰어놀 만한 평원'에서 이름이 유래된 이곳은 125만평(400만㎢)에 이르는 거대한 평원. 규모 면에서 수위를 다투는 간월'신불 억새능선보다 2배나 크다. 최근에 개발이 늦어지면서 평원은 잡초로 뒤덮여 방치되고 있는 게 아쉽다. 주변의 목장과 연계해 초지로 조성하든지 잡목을 밀고 억새평원으로 개발하면 명품코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불암과 갈림길에 고사리분교가 자리 잡고 있다. 2년 전 들렀을 때만 해도 교정이 뚜렷했었는데 이젠 잡목이 우거져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어느덧 오후. 억새에 하얀빛을 반사시켜주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며 노을을 뿌리기 시작한다. 석양에 물든 대평원 너머로 문득 사명대사가 오버랩 된다. 사자평 일대는 임란 때 승병들의 연병장. 이 평원에서 승군들이 연병(練兵)에 지친 고단한 몸을 누이고, 억새를 위안 삼아 행군에 지친 심신을 달랬다. 승병들의 창끝에서 나풀거렸을 억새꽃은 오늘 산꾼들의 머리 위에서도 한가로이 유영(遊泳)한다. 400년 시차를 넘어 여전히 같은 중력으로.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Tip] 억새 숲의 쉼터 '샘물상회' 정지홍씨

#들꽂 정원 가꾸며 조난객 구조도

샘물상회 주인 정지홍씨는 20여년 전 입산해 목장사업을 시작했다가 12년 전 지금의 가게를 열었다.

산속 생활 소감을 묻자 "RV차로 배내고개를 드나드니까 반(半)은 문명을 하는 셈"이라며 "보람이 없으면 어떻게 이 일을 계속하겠느냐"고 되묻는다.

이제까지 조난당한 사람을 구해준 게 50명은 족히 되고 생명을 구해준 사례도 4건이나 된다고 한다. 주변에 꾸며 놓은 들꽃 정원도 정씨의 작품.

이 화원과 쉼터를 등산객들에게 제공하고 막걸리, 라면, 커피를 팔아 서로 수지(收支)를 맞춘다. 억새 숲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도 있다. 민박요금은 5만원. 055)356-7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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