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 장애인 엄덕수(47)씨는 참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그의 재능은 그가 하는 일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인장가'서예가'가수라는 세가지 직업을 갖고 있다. 엄씨가 여러 직업에 종사하게 된 배경에는 장애를 뛰어넘으려는 강한 의지가 투영돼 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예와 음악에 입문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운동장에 나가 뛰어 놀 수 없었기 때문에 서예와 통기타 배우는 데 열정을 쏟아부었다. 인장일은 20대 중반 시작했다. 젊은 시절 그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몸이 불편해 제약이 많았다. 그래서 앉아서 할 수 있는 인장을 하게 됐다. 인장을 배우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인장을 가르치는 곳이 없어 거의 독학으로 도장 새기는 기술을 익혔다. 태어난 지 4개월만에 소아마비에 걸려 양쪽 다리 모두 기능을 상실했지만 장애는 그의 행보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낮에 엄씨를 만나려면 법원 맞은편(대구 수성구 범어3동)에 있는 '덕인당'이라는 인장업소를 찾아가야 한다. 그가 이곳에서 영업을 한 지는 20여년이 다 되어간다. 최근 인장업계에 기계화 바람이 불면서 손으로 도장을 파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그는 될 수 있으면 손 작업을 고집한다. 손으로 새긴 것과 기계로 새긴 것은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손으로 정성 들여 도장 하나를 팔 경우 30분~1시간 정도 소요된다. 기계로 작업을 하면 20분이면 충분하다. 엄씨에게 도장은 장인정신이 깃든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그가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요됨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도장을 파는 이유다.
간혹 손님이 원할 경우 기계로 도장을 파 주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그는 컴퓨터에서 다운받은 글자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서예를 배웠기 때문에 글자의 멋을 제가 조금 알고 있습니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글자는 획일적입니다. 서체를 조금만 다듬으면 더욱 멋있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도장 서체를 갖게 됩니다. 또 서체 변형은 위조 방지에도 도움이 됩니다."
한때 벌이가 괜찮았지만 요즘 인장업은 예전 같지 않다. 사인문화가 확산되면서 도장을 파는 사람들이 많이 감소했기 때문. 게다가 인감제도 존폐 이야기까지 거론되고 있다. "5년 후 인감제도 존폐 여부가 결정이 날 예정입니다. 만일 인감제도가 폐지되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 인장업은 더 이상 하기 힘들어집니다. 인장업에는 장애인들이 많이 종사합니다. 제도적인 보호책이 마련되어야 합니다"며 우려감을 표명했다.
해가 지면 엄씨는 덕인당 문을 닫고 동촌유원지 안에 있는 라이브카페로 출근한다. 그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밤 8시30분부터 11시까지 노래를 부른다. 파워풀한 가창력의 소유자인 그는 '대구의 조덕배'로 불린다. 1996년 KBS장애인가요제에 출연해 대상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옴니버스 앨범도 출시했다.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일부러 라이브카페를 찾아오는 손님도 있다. 24일에는 두류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열리는 '2011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성공개최 기원 대구시민한마음 대회'에 초대가수로 출연할 예정이다. 장애인가요제 대상 수상 후 여기저기 출연 제의도 많이 받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졌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의 노래 실력은 인정해준다.
노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그는 새벽까지 붓을 잡는다. 서예가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서예라는 것이 하루라도 연습을 게을리하면 금방 표가 나기 때문이다. 엄씨는 영남서예대전 대상을 비롯해 영남미술대전 최우수상,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대구미술대전 특선, 매일서예대전 특선 등 수많은 입상 경력을 자랑한다. 지난해 영남서예대전 초대작가에 오른 데 이어 올해는 대구미술대전 초대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서예가로서의 삶은 초대작가 이후가 더 힘이 듭니다. 이제는 저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한단계 더 도약하지 못하면 평범한 작가로 전락하게 됩니다.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는 아직 개인전을 한번도 갖지 못했다. 시간이 되면 개인전을 열고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노래도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9.9㎡(3평)남짓한 덕인당에는 그의 서예 작품과 상장이 벽면 가득 걸려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명언집'에서 발췌한 '一勤天下無難事(일근천하무난사), 百忍堂中有泰和(백인당중유태화)'라는 작품. '근면 한가지만 있으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없고 많이 참는 집안에는 큰 화목이 깃든다'라는 의미다. 그가 좌우명으로 삼은 글귀다.
좌우명처럼 아침부터 새벽까지 참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엄씨는 최근 가톨릭에 귀의했다. 세례명은 베네딕도. "종교를 가지기 전과 후를 비교해 보면 마음가짐이 많이 변했습니다. 종교를 가지기 전까지는 내 중심으로 세상을 살았지만 지금은 남을 배려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됩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선뜻 남을 돕지 못하는 요즘, 불편한 몸으로 남을 생각하며 살겠다는 그를 보고 아량은 신체적인 능력보다 마음의 능력에서 우러나옴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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