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람과 歲月] 택시인생 43년 이석주씨

80년대 개인택시, 월수입200만원 넘어 중산층 자부심

43년간 택시를 운전해 온 이석주씨, 대구·경북 개인택시 발기인 대표 및 초대지부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개인택시제도 부활후 대구경북 1호 면허자이다.
43년간 택시를 운전해 온 이석주씨, 대구·경북 개인택시 발기인 대표 및 초대지부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개인택시제도 부활후 대구경북 1호 면허자이다.
브리샤 택시
브리샤 택시

대구·경북 개인택시 발기인 대표 및 초대지부장을 역임한 개인 택시기사 이석주(68)씨. 군대에서 운전을 배운 그는 제대 뒤인 1967년 코로나 1대를 마련, 택시회사에 지입제로 등록해 형식상 법인택시기사로, 사실상의 차주로 운전을 시작했다.

이석주씨는 1970년대 전국에 300여대, 대구와 경북에 25대에 불과했던 개인택시 숫자를 늘리는데 일조한 사람이다. 정부에 개인택시면허자격 기준을 단축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고, 입법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77년 그렇게 받은 개인택시 32바 2012를 타고 거친 인생길을 달려왔다. 개인택시제도 부활 후 대구·경북 1호 면허이다. 당시 서울 동양방송을 통해 '집념의 경상도 사나이 이석주'라는 제목으로 15분 동안 전파를 타기도 했다.

이석주씨는 1978년 경북 개인택시 조합 창립 발기인 공동대표, 1981년 대구직할시 개인택시 조합 발기인 대표를 역임했다.

43년 택시운전을 하는 동안 코로나, 브리샤, 세븐틴, 포니2, 로얄 디젤, 스텔라, 쏘나타 등을 운전했다. 2001년 다이너스티를 구입, 지금까지 운전하고 있다. 1980년대 경유차였던 로얄 디젤을 샀던 것은 치솟는 휘발유 값을 감당하기 어려워서였다. 43년 운전 경력에 가벼운 접촉 사고 2번이 사고의 전부였다. 그는 "손님을 가장 빠르고 편안하게 목적지까지 모시는 데는 조심 운전이 최고"라고 강조했다.

◆좋은 세월은 지나간 듯

이석주씨는 택시 기사들에게는 1980년대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차를 몰고 거리로 나서면 어디나 손님이 있었다. 자동차가 적었던 시절이라 교통체증 따위를 몰랐다.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적었던 만큼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시절이었다. 택시 기사들이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자기 소유의 차를 가졌다는 것은 커다란 자랑이었다.

개인택시 운전자는 누구나 인정하는 중산층이었다. 평생 자식 키우며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 장거리 손님도 많았고, 종일 택시를 전세내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이석주씨는 당시 돈으로 한 달에 200만원 이상을 벌었다고 했다. 택시 영업으로 집을 장만하고 자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는 데 무리가 없었다. 개인택시 기사들의 자녀들 중에 판사와 검사, 의사와 변호사, 대학교수도 수두룩하게 나왔다.

개인택시의 빛이 바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마이카'시대가 도래하면서 부터다. 2000년을 지나면서 개인택시의 인기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LPG의 가격이 점점 오르는데다 손님은 갈수록 줄었다. 택시를 탈만한 사람들은 모두 자가용을 가졌고, 어쩌다가 택시를 잡는 손님들도 가까운 거리가 대부분이었다. 1980년대 한 달에 200만원을 거뜬히 벌던 이석주씨는 요즘은 한 달에 100만원쯤을 번다. 물가가 오른 것을 감안하면 수입이 70% 이상 줄어든 셈이다.

택시 영업수입이 떨어지게 된 이유는 많다. 손님이 줄었고, 자가용 승용차가 늘었다. 2001년까지 ℓ당 350원 하던 LPG 가격은 2009년 현재 ℓ당 850원으로 올랐다. 4부제였던 개인택시영업은 3부제(법인은 8부제에서 6부제로)로 제한됐다. 게다가 대구는 전국에서도 인구당 택시숫자 비율(인구 145명 당 택시 한 대)이 가장 높다. 서울이나 부산보다 유동 인구가 적어 실제 이용객은 수치보다 훨씬 적다.

"택시영업해서 집 장만하고 자식 키우던 시절은 끝난 것 같아요. 자식들 다 키운 나 같은 사람이야 큰 부담이 없지만 아직 어린 자식이 있는 사람들은 죽을 고생을 합니다. 그러니 무리하게 운전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교통위반에 걸리거나 사고가 발생합니다. 열심히 뛰어도 남는 게 없어요. 악순환이지요."

◆이런 손님 저런 손님

"기분 좋은 손님들도 많고, 기분을 교묘하게 망치는 손님들도 적지 않아요. 손님을 골라 태울 수는 없으니, 이런 손님도 있고 저런 손님도 있겠거니 생각합니다. 살다 보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모두 만나잖아요. 그래서 인생살이와 택시운전은 닮은 데가 많아요."

43년 운전을 해오는 동안 차비를 안 내고 도망치는 사람, 술에 취해 시비를 거는 사람, 욕을 하거나 때리는 사람 등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요즘은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두고 불만을 터뜨리는 승객이 많다고 했다.

"가장 지름길로 가고 있는데도 둘러간다고 다그쳐요. 목적지를 이야기하면 될 것을 길목마다 요리로, 조리로, 끊임없이 방향을 지시하는 사람도 있어요. 심지어 교통법규를 위반해서라도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옛날엔 손님들이 비교적 여유가 있었는데 요즘은 몸도 마음도 바쁘기만 한 모양입니다."

요즘 택시기사들은 대부분 손님들에게 어떤 길로 갈까요, 라고 묻는다고 했다. 출퇴근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선호하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설령 더 빠른 길로 간다고 해도 승객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니면 '둘러간다'고 화를 내기 때문이다.

"경력이 많은 기사들은 신호체계를 훤히 알고 있기 때문에 신호 떨어질 즈음에 맞춰 달립니다. 그런데 손님들 중에는 신호대 앞에서 오래 기다리더라도 쌩 달려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천히 가는 걸 못 참는 거죠. 천천히 달리면 시간요금이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간요금은 시속 15km 이하로 운전하거나 정차할 때 올라갑니다. 그러니 쌩 달려가서 신호대 앞에 서서 기다리면 요금이 더 나와요. 신호에 맞게 천천히 달려가는 게 요금도 적게 나오고 안전합니다."

◆택시와 거리는 나의 직장

이석주씨는 3천cc 대형 택시를 운전한다. 큰 차는 연료비가 더 들지만 종일 운전하는 자신에게도, 손님들에게도 편안함을 주기 위해서다.

"택시는 나의 일터입니다. 연료비는 조금 더 들지만 근무 환경이 좋으면 피로가 덜하지요. 피로는 운전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입니다. 손님들도 좋은 차 타니 좋아하고요. 가끔 차가 좋으면 요금이 더 비싸지 않나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요금은 꼭 같습니다."

그는 기사들이 거리에서 법규를 지키고 스스로 절제해 줄 것을 당부했다. 특히 중앙로에 개구리 주차는 하지 말자고 강조했다.

"중앙로 정비 후에 버스나 택시만 들어갑니다. 그런데 택시들이 손님을 기다리느라 개구리 주차를 하고 있으니 버스들이 경적음을 울려댑니다. 중앙로로 들어갔다가 손님이 있으면 태우고 없으면 그냥 지나치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거리도 깨끗하고 막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석주씨는 승객을 태운 택시에 한해서 버스전용차로 이용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손님을 목적지까지 빨리 데려다 줄 수 있고, 출퇴근시간 체증도 줄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현행 개인택시 3부제(2일 근무 1일 휴무)를 4부제로 환원해야 한다고도 했다. 근무 날짜가 적으니 운전자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무리한 운전을 하고, 그래서 사고도 잦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제 강화 후 사고가 늘었고 개인택시 공제조합 보험료가 4번이나 올랐다고 했다.

한때는 운전 자체로 큰 자랑이던 택시, 그러나 지금은 이래저래 걱정도 많고 과제도 많은 직업이 돼 있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개인택시, 67년 서울 4대 첫 등장 70년대 중반 대구경북 합쳐 25대

우리나라에 영업용 자동차가 들어온 것은 1912년 4월로 이봉래라는 사람이 일본인과 함께 '포드T형' 승용차 2대를 도입해 서울에서 시간제로 임대영업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최초의 택시회사는 1919년 12월 일본인 노무라 겐조(野村賢三)의 경성 택시회사이며 노무라는 미제 닷지차 두 대로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택시 미터기가 없었고 시간당 6원의 전세 요금을 받았다. 1921년 조봉승이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종로택시'회사를 설립했다. 1926년 '아사히 택시회사'가 최초로 미터 영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대절영업(전세영업)과 미터식 택시영업이 구분됐다. 해방 이후 전국에서 132명의 사업자가 1천573대의 택시를 운행했다. 우리나라에서 승용차 택시운송업이 시작된 것은 1962년 일본으로부터'새나라' 자동차가 수입되고 부평에 새나라 자동차공장이 가동되면서부터다. 이때 경영 방식은 지입제가 대부분이었다. 기사들이 자기 자동차를 가지고 회사에 소속돼 근무하는 형태였다.

개인택시가 등장한 것은 1967년 7월이다. 서울에 4대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대됐다. 1970년대 중반까지 전국에 개인택시는 300여대, 대구와 경북에는 각각 10대와 15대가 있었다. 1977년 개인택시 면허 기준이 완화되면서 개인택시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2009년 현재 전국적으로 개인택시 약 16만대, 법인택시 약 10만대가 운행 중이다. 대구에는 개인택시 1만150대, 법인택시 약 7천대가 운행 중이다.

2008년 현재 택시 한 대당 인구는 대구가 145명, 서울 136명, 부산 141명, 인천 180명, 광주 170명, 대전 161명, 울산 184명이다. 서울과 부산의 유동인구가 많은 점을 고려할 때, 전국에서 대구의 택시 숫자가 가장 많다고 볼 수 있다.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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