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백두를 가다] <49>생·활·사(生·活·死)의 고장 성주

성산고분군은 성주의 정신인 성산가야의 대표 유적지다. 수차례의 발굴조사에서 금귀걸이, 은제장식구 등 2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성산고분군은 성주의 정신인 성산가야의 대표 유적지다. 수차례의 발굴조사에서 금귀걸이, 은제장식구 등 2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칠곡에 이어 다다른 성주(星州). 성주는 낙동강 중류의 대표 고을이다. 또한 성씨의 고장으로 각 가문의 수많은 인재가 성주골을 빛냈다. 조선 선조 때는 지금의 경상남북도의 도청 격인 경상감영이 설치된 유서 깊은 고을이기도 했다.

우린 낙동강 역사·문화의 대표 고을 성주에서 성주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생(生)·활(活)·사(死) 문화다. 성주 사람들은 성주를 일컬어 "사람이 태어나서 생활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흔적을 고이 간직한 고을"이라고 했다.

성주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세종대왕자태실-한개마을-성산고분군 라인을 두고 칭하는 '자긍심'이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생명(生)의 탄생, 전통민속마을인 한개마을은 생활(活)의 공간, 성산고분군은 죽음(死)의 영역으로, 이 세 영역에서 생·활·사라는 인간의 일생에 관한 문화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주의 생·활·사 문화는 타지방과는 분명 차별화된 역사접근법이었다. 또한 성주가 지금 야심있게 만들어가는 '문화콘텐츠'였다.

생의 문화인 세종대왕자태실로 향했다. 월항면 인촌리의 나지막한 산에 위치한 세종대왕자태실은 지금 옷을 한창 갈아입고 있었다. 태실 일대를 태교문화원, 분만체험관, 휴테라피센터, 산후조리원, 탄생조각공원, 태 연구센터, 생명지 등이 들어서는 '아기별국'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우리나라 생 문화의 산실이라고 할까.

태실은 우리의 선조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을까? 조선의 왕실은 처음 태를 산모와 신생아로부터 분리하는 순간부터 소중하게 다뤘다.

일반 백성들은 출산 후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어 뭉긋뭉긋하게 태운 뒤 타고 난 재를 강물에 띄워보내는 방법으로 태를 다뤘으나 왕실은 달랐다.

왕실은 태를 태우지 않고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소중히 안치했다. '태 업무'를 주관하는 관상감에서는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태를 묻었는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이라 불렀다.

곽명창 성주군 문화유산해설사는 "조선의 왕실은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좋은 기를 받으면 그 태의 주인이 무병장수해 왕실의 무궁무진한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여겼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낙동강 지역을 1년 가까이 취재하면서 지명에 태봉이라는 명칭을 적잖게 보아왔다. 대개는 태를 묻은 봉우리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태봉(胎封)은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했을 때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加封碑)를 세운 것으로 임금의 태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태실, 태봉, 또는 태실·태봉마을 등으로 일컬어지는 곳은 전국적으로 2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의 왕실은 왜 관리하기 편한 일정 지역의 명당이 아닌, 전국의 명당에 태실을 섰고, 수호사찰과 관리청까지 둬가면서 지극정성이었을까? 그 이유가 재미있다. 조선의 왕릉은 도읍지인 한양의 100리 안팎에 모셔져 있다. 지금의 서울·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는 얘기다. 반면 태실은 전국의 명당에 산재했다. 조선 왕실은 왕조의 은택을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누리게 하겠다는 의도, 즉 왕조와 백성들 간의 유대감을 더욱 공고히 하는 일종의 통치이데올로기였다.

한편으론 기존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의 명당을 왕실이 선점해 태실을 씀으로써 왕조에 위협적인 인물이 배출될 수 있는 요인을 없애자는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왕실은 국왕과 왕자들의 태를 전국 길지에 묻어 왕권 안정과 번영을 기원한 것이 아니겠는가.

국가지정 사적 제444호인 세종대왕자태실은 전국에서 태실이 가장 많다. 세종대왕의 왕자 태실 18기와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만든 태실 석물 1기가 있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에 등극한 세조 수양대군, 왕권 다툼 끝에 형 수양에 의해 사사(賜死)를 받은 안평대군, 단종복위를 꿈꾸다 형 수양에 의해 처형된 금성대군, 임영대군, 평원대군, 이복형 수양의 측근인 계양군과 밀성군 등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래서일까 세종대왕자태실은 적잖은 수난이 있었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은 뒤 이를 반대한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과 계유정난(사육신 등이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려는 사건)에 죽은 안평대군 등의 태실과 태실비가 세조 3년 산 아래로 던져졌다고 알려졌고, 무려 5백년이 지난 1977년 흘어진 석물을 찾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또한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시 예조판서인 홍윤성이 가봉비를 세조의 태실 앞에 세웠으나 지금은 비문이 지워져 알아볼 수 없다. 민간에 전하는 설에 의하면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붓고 돌로 갈아서 거의 글자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성주는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의 태를 묻었다는 태종태실지, 비운의 임금인 단종의 태를 묻었다는 단종태실지 등도 있어 우리나라를 가장 대표하는 '태실 고을'로 자리 잡게 됐다.

일행은 생의 문화를 접한 뒤 활의 문화를 만나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태실 바로 인근인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성주 사람들의 전통 삶을 간직한 곳이다.

초겨울 한개마을은 전통 기와집과 옷을 벗은 감나무가 어우러져 겨울 전통마을의 또 다른 멋을 내고 있었다. 마을의 기와집들은 뒷산에서 아래로 줄을 선 듯 나란했고, 집집마다 종택과 고택을 알리는 안내판이 잘 갖춰져 있었다.

현재 한개마을에는 6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 앞쪽에 더러 변형되거나 새로 지은 양옥이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성산 이씨가 모여 사는 한개마을은 조선시대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정착해 터를 잡은 후 50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마을 뒷산인 영취산이 좌청룡·우백호로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옛날 나루가 있었던 하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어 영남의 최고 길지 중 한 곳으로 일컬어졌다.

마을은 사도세자의 호위 무관으로 세자 사후 사립문을 한양 땅이 있는 북쪽으로 내고 평생을 은거해 충절을 다한 돈재 이석문, 영남 고을의 대표 선비였던 응와 이원조와 한주 이진상,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계 이승희 등의 이름난 인물들이 바로 한개인이다.

우리 일행이 지금까지 거쳐온 경북의 큰 고을 이름은 유명인이나 가문의 이름을 딴 경우가 적잖았다. 하지만 한개마을은 순우리말로 마을의 이름을 지었다.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개는 곧 '큰 개울' 또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인 것이다.

지금은 개울 수준의 하천이 논을 사이에 두고 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마을 앞을 지나는 큰 길이 하천이 흐르던 자리였다. 한개마을은 지금 성주 '활'(삶)의 상징지로 변모하고 있다.

군은 한개마을 활성화사업을 통해 마을에 전통문화체험관, 문화전시관, 전통우물과 빨래터, 고택체험장 등을 만들고 있다.

성주읍 성산리 일원의 성산고분군은 태실과 한개마을을 거쳐 생·활·사의 마지막 탐방 코스다.

고분군은 성주의 정신이다. 성주읍, 월항면, 금수면 등지의 고분군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다. 무려 500여기에 달한다. 고대 씨족의 무덤이라고 한정하기엔 그 수가 너무 많지 않은가. 그래서 역사적 자료가 다소 미흡하지만 학계에선 성주의 고분군은 6가야 중 하나인 성산가야의 고분으로 보고 있다.

성주 고분군의 입지는 고구려와 신라의 고분들과 비교해 특이하다. 대개 능선의 정상부나 비탈, 혹은 독립된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고, 그 주위에는 예외없이 하천과 평야가 펼쳐져 있다. 또 고분군의 주위에 성산산성, 용각산성, 할미산성 등 성곽이 축조된 가야고분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성주의 여러 고분군 중 성산고분군은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이다. 성산고분군은 위치부터가 남다르다. 성주의 진산인 성산(389.2m)에 자리잡았다. 성산은 주능선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거기서 사방으로 지맥이 뻗는데, 서북 능선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130여기의 고분이 밀집했다. 대부분 원형이다. 크기는 직경 10m 안팎으로 보였고, 직경이 30m이상인 것도 여러 있었다.

특히 대형분의 경우 고분군의 중앙 머리에 해당되는 능선의 정상부에 많이 분포돼 있어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성산가야 지배세력의 집단 무덤으로 설득력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차례의 고분군 발굴조사에서도 각종 토기류와 금귀걸이, 은제장식구, 금속류 등 2천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성산 고분군에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고분 구조나 출토 유물의 양식이 바로 인접한 고령지역과는 너무나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고령은 대가야가 존재한 고장이다. 성주에는 당시 대가야와는 엄연히 다른 별도의 가야문화 또는 신라와 밀접한 독립 문화를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성주의 고분군은 아직 성산가야를 확실히 입증할만한 유물이 나오지 않고 있다. 한편으론 아직 무덤 속에 고이 간직한 역사가 아직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잠자고 있는 무덤 속 역사가 세상에 찬란히 드러날 때 성주의 정신인 성산가야가 우뚝 서지 않겠는가.

성주는 지금 성주 생·활·사의 종착지인 성산고분군 일대에 박물관과 사적공원을 짓는 사업에 열정을 쏟고 있다.

이종규기자 성주·최재수기자 사진 정운철기자

자문단 배춘석 성주문화원장 곽명창 성주군 문화유산해설사 이길영 성주군 공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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