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존재인 사람은 일평생 누군가와 더불어 관계를 맺으면서 살기 마련이다. 태어나서는 부모 형제 등 가족의 품에서 살아가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선생님과 또래 친구를 만나서 사귀며 성장한다. 또한 사회에 진출하면 선후배 동료 혹은 고객들과의 수많은 만남과 사귐, 그리고 헤어짐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주변의 성공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이룬 많은 성취들이 원만한 인간관계에서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나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공자가 인(仁)의 실천 방안으로 제시한 충서(忠恕)는 먼저 자신의 덕성을 충실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자와의 관계에서 너그러운 배려를 실천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유학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선인들은 먼저 남을 배려할 때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지혜를 터득하고 자녀와 제자 등 아랫사람에게 배려의 가르침을 주었다.
근래 도시화에 따른 핵가족화로 이러한 가르침이 점차 소홀해져 가정, 학교, 직장, 사회 어디서도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좋은 사귐의 본보기'를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개인과 집단의 이익에 집착한 나머지 상대를 자극하고 이용함으로써 반목과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러면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상대를 대해야 나도 행복하고 사회도 화목해질 수 있을까? 선현들의 실제 사귐은 어떠했을까? 여기서 약 450년 전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사귐을 되돌아보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처음 만났을 당시 퇴계는 58세, 고봉은 32세로 26년이라는 큰 차이가 났을 뿐 아니라, 퇴계는 온 조선에 알려진 대학자요 성균관 대사성(지금의 서울대 총장에 해당되는 직책)을 지낸 인물이었던 반면, 고봉은 막 과거에 합격해 관직을 제수받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또한 퇴계는 경상도 예안(지금의 안동) 사람이고 고봉은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서, 고향을 떠나온 서울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첫 만남 이후 두 분은 한국 유학사상에서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전개하게 된다. 사람의 감정 표현인 사단과 칠정의 유래와 상호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다. 퇴계는 젊은 고봉의 주장에 대해 나이나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 배척하지 않고 귀 기울였으며, 고봉 역시 상대의 지위나 나이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피력하며 논쟁에 임했다.
8년간 서신을 통해 이어진 논쟁은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각자의 주장을 조금씩 양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두 분의 교유를 통한 학문적 논쟁의 성과는 이후 수많은 학자들에게 이어져 한국 유학의 이론을 풍부하게 했고, 성리학설에서 중국을 능가하는 학술적 성취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논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쟁 이후 그들은 서로를 더욱 존경하고 아끼는 관계를 유지하며 삶을 살아갔다. 예를 들면, 고봉은 선조에게 퇴계를 성현의 반열에 오를 인물이라고 극찬하면서 반드시 조정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에 대해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는 노쇠한 사람을 추천했다며 격한 꾸지람을 했지만, 퇴계 역시 선조의 인재 추천 요청에 주저 없이 고봉을 천거했다.
퇴계는 죽음에 앞서 자신의 묘비문을 겸손한 표현으로 직접 적었는데, 이것이 96글자의 그 유명한 자명(自銘)이다. 그것은 고봉이 자신의 묘비문을 지을 가능성이 높고 그럴 경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존숭의 내용이 들어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소박한 장례를 당부한 퇴계의 유언과 달리 조정에서는 나라에 끼친 공을 감안해 예장(禮葬)을 치르게 하면서 고봉에게 묘비문을 쓰도록 했다. 퇴계 생전의 의도를 헤아려 묘비문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지 못한 고봉은 자신의 문집에서 퇴계를 향한 지극한 존경의 마음을 담은 말을 남겼다.
"산도 오래되면 무너져 내리고 돌도 삭아 부스러질 수 있지만, 선생의 이름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山可夷, 石可朽, 吾知先生之名, 與天地而並久)
고봉의 이 글귀는 그마저 세상을 떠난 30여년 후 퇴계의 묘 속에 지석문이 되어 묻히게 된다.
현격한 세대와 지역, 그리고 생각의 차이를 넘어 공자의 가르침대로 학문으로써 서로 사귀고(以文會友) 그 사귐을 통해 인격을 도야해 감으로써(以友輔仁) 평생의 동지가 될 수 있었던 향기로운 사귐의 본보기이다. 이익과 욕망의 사귐이 횡행하는 세태 앞에서 선인들의 그런 사귐이 더욱 그리워진다.
김병일 한국국학진흥원장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