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속 예술 산책] 영화에 나오는 '노래방 장면'

'광식이 동생 광태'
'너는 내 운명'

바야흐로 노래방의 계절이 돌아왔다.

연말을 맞아 송년회의 끝은 늘 노래방이 장식한다. 얼큰하게 취해서 친지와 친구, 직장 동료들과 함께 열창하는 모습도 이젠 정겨운 연말 풍경이 됐다. 노래 레퍼토리로 세대를 가늠하고, 실력보다는 감정으로 그 사람의 정서를 느끼고, 또 선곡에 따라 그 사람의 취향까지 알 수 있으니 노래방은 모든 이들이 동참하는 문화 사랑방이라 하겠다.

한국 영화에는 노래방 장면이 많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과 성격, 현재의 심정을 전달하는 좋은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박진표 감독의 '너는 내 운명'(2005년)에서 순정다방의 은하(전도연)가 부르는 '오빠'는 둘의 인연을 묶어주는 연결고리다. 순진한 시골청년 석중(황정민)이 동네 친구들과 순정다방 아가씨들과 함께 간 노래방. 안그래도 예쁜 그녀가 찰랑찰랑 춤을 추면서 '오빠, 나만 바라봐~'라고 노래한다.

왁스의 '오빠'는 미국 팝가수 신디 로퍼의 '쉬 밥'(She bop)을 리메이크한 곡이다. 흥이 난 소녀가 신나게 흔들며 노는 모습을 단순하게 그린 원곡에 비해 '오빠'는 믿고 의지할 오빠를 찾는 한국적 가사를 담고 있다. 통장 5개와 젖소 한 마리로 목장 경영을 꿈꾸는 노총각의 마음을 울리지 않을 수 없는 노래다.

김상진 감독의 '광복절 특사'(2002년)는 애인 경순(송윤아)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탈옥한 재필(설경구)이 광복절 특사 명단에 든 것을 알고 필사적으로 감옥으로 되돌아가는 줄거리다. 탈옥한 그가 애인을 데리고 찾은 곳이 노래방. 돌아가는 조명에 은은하게 울리는 에코, 그리고 경쾌한 탬버린, 새우깡… 이 얼마 만에 느끼는 자유인가.

분홍색 양복을 입고 담배를 꼬나문 재필 앞에서 경순이 '분홍 립스틱'을 부른다. '오늘밤만은 그대를 위해서 분홍의 립스틱을 바르겠다'는 한 여인의 결연한 의지(?)를 그린 노래. 언제 떠날 지도 모를 그대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심정이 잘 묻어나는 가사다. 양아치 같은 재필도 내심 순정파다. 허세를 부리지만 주머니 속에는 그녀에게 줄 약혼반지가 있다. 경순이 노래하는 중간에 몰래 반지를 꺼내 보는 탈옥수의 연정 또한 간절해 보인다.

'어린 신부'(2004년)에서 기억나는 장면이 여고생 신부 보은(문근영)이 부르는 '나는 아직 사랑을 몰라'라는 노래다. 하긴 부모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을 했지만, 여고생이 무슨 사랑을 알까. 예비군 훈련을 마친 신랑의 예비군복을 걸치고 열창하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철없는 신부이다. 그것도 입을 헤벌리고 쳐다보는 신랑 친구들 앞에서 말이다.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2002년)에서 '걸어서 저 하늘까지'를 부르는 종두(설경구)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노래방 브라운관에 머리를 박고 공주(문소리)를 향해 '어둔 미로 속을 헤매던 과거에는 내가 살아가는 그 이유 몰랐지만, 하루를 살 수 있었던 건 네가 있다는 그것. 너에게 모두 주고 싶어 너를 위하여 마지막 그 하나까지'라고 열창한다. 무심한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펀치처럼 강렬하다.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2003년)에서 잡지사에 다니는 대학원생 원상(박해일)이 부르는 '꽃잎'은 노래 가사처럼 쓸쓸하면서도 한없이 애잔하게 만든다. '꽃잎이 지고 또 질 때면 그날이 또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라며 헤어진 그 사람을 애타게 그리는 김추자의 노래다. 영화에서 원상은 유부남인 잡지사 편집장(문성근)과 묘한 관계를 유지하는 연상의 여인 성연(배종옥)을 짝사랑한다. 회식 자리에서 둘이 친밀하게 접촉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이 노래를 부른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미움을 잘 그리고 있는 노래방 명장면이다.

김현석 감독의 '광식이 동생 광태'(2005년)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호섭의 노래 '세월이 가면'을 떠올릴 것이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고백 한 번 못해보고 라이벌이 등장하면 숨어버리는 남자 광식(최주혁). 짝사랑하는 윤경(이요원)과 그녀의 남자 일웅(정경호)과 함께 노래방에 간다. 수줍어 말도 못하는 그와 달리 일웅은 적극적이고 표현도 잘하는 편이다. 노래 레퍼토리만 봐도 그렇다. 일웅은 지누션의 '전화번호'를 부르는데, 좋아하는 여자의 전화번호를 따려는 남자의 대시를 그린 노래다. 랩을 섞어 부르는 그의 위세에 눌려 어렵게 찾아 누른 817번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을 취소해 버린다.

노래방에서는 못 부르지만, 결국 그는 그녀의 결혼식장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 줘요.' 사랑한 그녀를 떠나보내며 그래도 털어내지 못하는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달랜다.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년)에서 준석(유오성)이 프랭크 시나트라의 명곡 '마이웨이'(My way)를 부르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마이웨이'는 깡패 세계에 들어와 폼 나게 살아보려는 가련한 인간이 부르는 노래 치고는 거창한 곡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는 '끝장 인생'에 대한 은유가 잘 드러난다. 자신만만하고, 너무나 당당하게 부르던 이 남자는 결국 자신의 친구를 무참히 살해하는 우정의 끝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세계를 마감한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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