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 백성은 진실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희망은 버거워 하고요, 소통은 귀찮아하며 자유를 주면 망설입니다."
"새주님! 백성을 자기 아기 돌보듯, 늘 얘기하려 하고 이해시키려 하고 더 잘 되길 바라지 않고, 늘 야단치고 통제하고 재우고만 싶어 한다면…."
얼마전 끝난 TV 드라마 '선덕여왕'의 한 장면이다. 미실과 덕만의 대화는 늘 불꽃이 튄다. 그래서 보는 이를 숨죽이게 한다. 게다가 절정을 향해 치닫는 전쟁 영화의 마지막 전투 신(scene)에나 나올 듯한 배경 음악이 더해져 비장하기까지 하다. 토씨 하나 조사 하나 버릴 게 없고, 딱 떨어지는 톤(tone)의 고저와 호흡의 장단이 리드미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장면이 제대로 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미실의 표정에서도, 덕만의 눈빛에서도 절로 보여지는 절절한 꿈, 사랑, 그리고 그것을 향한 치열함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이, 그리는 꿈이 '신국과 더 위대한 신국의 내일'이라는 점에서 둘은 서로 맞닿아 있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같은 사랑, 같은 꿈을 향해 달려가는 두 사람의 방법적 차이가 궁금해져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 보면 미실과 덕만의 '소통'에 관한 생각의 차이가 보인다. 소통의 대상과 범위가 다르고 기준과 방법이 다르다. 덕만과 미실이라는 두 캐릭터의 결정적 차이도 여기에서 비롯된 듯하다.
기본적으로 미실의 소통이 '자기 의지의 관철'이라면 덕만의 소통은 '여러 의지의 융화'이다. 미실의 소통이 왕과 귀족까지라면 덕만의 소통은 거기에 백성이 더해진다. 빠르고 효율적인 미실의 소통에 비해 이해와 설득에 바탕을 둔 덕만의 소통은 느리고 더디다. 미실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 시간에 열심히 따라오라 할 때 덕만은 어디로, 왜 가야만 하는지 이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설명한다.
꿈꾸는 신국의 미래를, 지배하는 소수의 역량과 지배당하는 다수의 복종의 '정도(程度)'로 가늠하는 미실, 그런 미실의 눈으로 볼 때 덕만은 적어도 어리석거나 그렇지 않다면 정적(政敵)을 이기기 위해 게임의 규칙까지 무너뜨리려 하는 위험한 존재다. 반면 복종이 아닌 다수의 자발적 의지와 역량이 신국의 미래를 만들고 이를 가능케 하는 소통은 진심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덕만에게 미실은 분명 신국의 내일을 맡기기에 부적절한 존재다.
덕만을 향한 미실의 생각이 보인다.
"공주님! 백성과 소통하겠다고요? 그래서야 어찌 신국을 지켜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은 헛되이 흘러가고 질서는 무너지고 혼돈만이 찾아올 것입니다."
미실을 향한 덕만의 반박이 들린다.
"새주님! 백성의 힘이 곧 신국의 힘입니다. 시간이 걸려도, 힘이 들어도, 반드시 해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어내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소통은 늘 시대의 화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소통을 향한 인간 사회의 노력은 삶의 영역을 지키고 확장시키려는 노력과도 맥이 통한다. 저마다 각양각색의 소통을 끊임없이 일용하며 삶을 이어가고, 이왕이면 자기의 방식과 색깔로 이루어지길 원한다. 그리고 힘이 있는 자의 기준은 그렇지 않은 자의 기준에 비해 훨씬 쉽게 소통된다.
'신국의 기준으로 소통할지언정 타국의 기준으로 소통당하지 않는 나라!'
그러고 보면 미실과 덕만의 소통도 그 귀결점은 서로 닮아 있다.
그래서 덕만은 물론이려니와 끝까지 미실이 밉지가 않다. 오히려 그 가늠할 수 없는 담대함과 통찰력, 의지와 용기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불꽃같은 삶이 너무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다. 하지만 힘으로 이루어진 일방적 소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소통의 넓이는 이해의 폭과 비례하고 소통의 질은 진심의 정도와 비례한다. 소통의 전제는 '공존(共存)'이다. 그래서 소통의 절차적, 방법적 진보는 사회 및 역사의 진보와 궤를 같이 한다.
올해엔 제5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있다. 덕만 같은 사람은 감동적이어서 좋고 미실 같은 인물은 매력적이어서 좋다. 이왕이면 지역민을 생각하면 절로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절절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많이 나오고 또 당선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지나친 백성의 욕심일까?
권은태 시나리오 작가·㈜마루커뮤니케이션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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