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학습도 시류에 따르는 모양입니다. 한자 학습 열풍이 대단합니다. 최근 어린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마법천자문』이란 책을 보면 잘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한자를 어려워하는 요즘 아이들의 취향에 맞추어 천자문을 만화로 표현하여 시각적으로 각인시키는 책입니다. 나름대로 스토리도 있고, 재미도 있어서 몇 차례 반복해서 보면 저절로 글자의 뜻을 익히고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을 무작정 외우던 옛날과 비교하면 공부 방법도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배움의 본질입니다. 배움은 때로 잘못 배우게 되면 배우지 않음만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자 공부가 바로 그렇습니다. 한자에 대한 관심 유도와 학습효과만을 고려해서 무절제하게 만들어진 교재들의 상당 부분은 오류가 있습니다. '천자문' 학습도 그 경우입니다. '천자문'은 각각 독립된 1천자의 한자로 구성된 한자 초보자를 위한 교재로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정주가 쓴 『천자문뎐』(포럼, 2009)을 보면 '천자문'은 단순한 한자 학습 교재가 아니라 8자로 된 125개의 완전한 문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내용도 세상의 이치를 담고 있는 철학서이자 역사서입니다. '천지현황(天地玄黃)이요 우주홍황(宇宙洪荒)이라'는 첫 문장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인식입니다. 성서로 치면 창세기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 거칠다는 표현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궁금증을 담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우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천자문이 내린 답은 하늘은 '검다'(玄)는 것입니다. 현(玄)자는 검은 색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멀다', '그윽하다'는 뜻입니다. '현묘(玄妙)하다'는 표현을 운용하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그래서인지 옛날 어른들은 '검을 현'이 아니라 '감을 현'이라고 음독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묘하고 가물가물하다는 의미로서 하늘을 눈에 보이는 색깔로 본 것이 아니라 공간의 크기와 깊이로 느낀 것입니다. 땅이 황색인 것은 황하문명이 만든 중국의 색깔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색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세계관에서 누런 색은 언제나 중심에 자리 하고 있고, 천자가 사용하고 중국을 상징하는 색깔로 여겨집니다.
우주홍황(宇宙洪荒)에서 언급된 우주도 단순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구 밖의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宇)는 위아래와 동서남북의 방향을 뜻합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당시 사람들의 공간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주(宙)는 과거와 미래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우(宇)가 넓다는 것은 천지의 공간이 끝없이 넓다는 뜻이고, 주(宙)가 거칠다는 것은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이 인간의 힘에 벅찰 정도로 거친 상태라는 뜻입니다. '우와 주'는 모두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결국 인간이 사는 집은 넓고 거친 시간과 공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주흥사가 하룻밤 동안에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천자문 기술 과정에 대한 오해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천자문에 실린 글자의 수입니다. 알려진 바와 다르게 천자문은 독립된 1천개의 한자가 아니라 정확하게 999개의 한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77번째 문장인 '구주우적(九州禹跡)이요 백군진병(百郡秦幷)이라'와 117번째 문장인 '석분리속(釋紛利俗)하니 병개가묘(倂皆佳妙)라'에서 쓰인 '아우를 병'(倂)자가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뜻의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룻밤에 즉흥적으로 만든 문장으로 아이들의 기초학습용 교재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잘못된 것입니다. 한정주는 『천자문뎐』의 서두에서 한자에 얽매이지 말고 문장을 보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천자문이 담고 있는 전통 중국인들의 철학적 인식과 신화, 역사적 사실과 교훈 그리고 오늘날의 의미들에 대해 주목하라는 주문입니다. 세상만사를 단순화시키는데 길들여진 우리들, 꼼꼼하게 천자문을 읽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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