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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산수유 피고지고(박도일 지음/북랜드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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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지 않은 것이 어디 있더냐"

'한 사람을 사랑했네/ 오솔길 같은 사람/ 프리지어 향 날리는 푸른 밤 같은 사람/ (중략) 내 눈에서 빛이 되던 사람/ 내 가슴에서 물소리가 되던 사람/ 그 바람꼭지 같은 사람을 사랑했네' -한 사람을 사랑했네- 중에서.

말과 글은 곧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박도일은 웃고 있으되 슬픈 사람, 쪼그리고 앉아 무심한 듯 집 앞 골목에 난 풀을 뽑고 있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같다. 적어도 그의 시집 '산수유 피고지고'는 그렇게 읽힌다. 혹 구정물 버리려고 밖으로 나왔던 마누라가 '누구 기다리시오?'라고 물으면 시치미 뚝 떼고 '내가 기다리기는 누구를 기다려?'라고 되물을 성싶은 사람 같다.

'하하하' 소리 내어 웃기 좋아하는 사람 같은데, 그 웃음 뒤에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을 상실을 가진 사람 같다. 그가 잃어버린 것이 사람인지, 세월인지, 추억인지 어쩌면 그 모든 것인지 모르겠다.

'비 오는 강가에 서면/ 모두가 흘러내리는 것뿐이다/ 버들잎과/ 버들잎을 문 세월과/ 갈매기로 나는/ 사내 이마의 주름과/ 비오는 강가에 서면/ 거슬러 오르는 것도 있다/ 버들치 피라미 송사리/ 그보다 더욱 세차게 거슬러 오르는 것/ 그대 회상/ 영혼을 파고들던/ 맑은 샘 한 줄기/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던/ 한 줄기 샘' -비 오는 강가에서-

도광의 시인은 '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요즘 시들 중에는 난해하다 못해 어불성설이 되고 마는 것들이 많다. 시가 의미 있는 것이 되자면 난해할지언정 어불성설이 돼서는 안 된다. 흰 돛단배들이 떠 있는 지중해와 비둘기들이 거닐고 있는 기와지붕을 비유한 폴 발레리의 는 얼마나 정치한가. 시가 난해하더라도 그 의미가 시의 보편성 어느 언저리에라도 닿아 있어야 가치 있는 것이 되고, 시의 보편성 테두리를 넓혀주는 구실을 한다. 좋은 시란 발견이 있고, 감동이 있고, 진실한 느낌과 아름다움, 새로움이 넘쳐나는 시다. 시를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난센스의 나열과 실패한 은유를 시의 특권이라고 내세우는 시인들과 박도일은 구분된다.'

시집 '산수유 피고지고'에서 박도일은 유년에 대해, 젊은 날들에 대해, 이제는 지나가버린 날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날들은 그다지 오래전의 것들은 아니다. 시간과 무관하게 바로 '어제'까지도 그는 유년이었고, 청년이었던 듯 하다. 나이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날들이 그랬던 듯 하다. 나이 마흔만 돼도 '가슴 뛰는 연애'란 먼먼 옛날 일처럼 여겨지기 십상인데, 1955년생 박도일은 여전히 '연애하는 청년' 같다.

"처연히 피었다 진 사랑의 기억도 찬찬히 되씹어 보면, 사는 날은 사랑 아니면 이별 아니던가."

'그립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인데, 그는 나이가 젊어 청년이 아니라 그리워할 줄 아니 청년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차마 못쓰고/ 온 길거리에/ 빈 엽서만 무수히 뿌리누나' -가을-

박도일은 과장이나 언어의 유희,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그는 시적 아름다움과 감동이란 '미학 언어'가 아니라 '진솔한 삶'에 있음을 보여준다. 159쪽, 9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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