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50돌 맞은 2.28…다시 모인 '백발의 주역들'

경북중 고 42회 졸업생 200명, 민주화운동 법적 인정 한껏 고무

2.28민주화운동 법적 인정, 다시 모인 그들

"여기는 아직 그대로네. 우리만 변했어."

지난달 27일 오후 4시 경북중·고 42회 졸업생 200명이 모교 '2·28민주화운동 기념동산'에 모였다. 1990년 2·28 대구학생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아 경북고 야구장 옆 동산에 조성된 동산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은 경북중·고 졸업생들은 1960년 2·28 운동 당시 까까머리 중고생에서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다.

이들은 2·28기념탑을 둘러보며 당시를 회고하고 지난해 민주화운동으로 공식 인정받은데 고무된 표정이었다.

홍종흠(68)씨는 "5·18민주화운동 등 주요 민주화운동들이 인정받은 반면 2·28 대구학생민주화운동이 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아쉬웠는데 늦게나마 법으로 인정돼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2·28민주화운동은 지난해까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학계 등에서는 이미 그 입지가 확고했다. 2005년 연세대 기록물보존소가 2·28 대구학생민주화운동의 원인과 전개과정 등을 조사, 기록한 '2·28 대구사항 보고서'는 2·28민주화운동이 4·19혁명의 시작인 것으로 평가했다. 1960년 3.15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 독재에 항거,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 의거가 이후 마산의 3.15 부정선거 항의시위로 이어졌으며 결국 4·19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참가자들의 자긍심은 컸다. "우리가 대한민국 역사를 바꿨다"는 자부심이다. 이들의 기억 속에 2·28은 어제 일어난 일인 듯 생생했다.

실제 2·28민주화운동은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의 첫걸음이라는 평가도 뒤따른다. 10년 전인 2000년 2·28 대구학생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던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축사에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효시는 2·28운동"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그러나 2·28정신 계승과 관련해 당시 시위주역이었던 경북중·고 졸업생들의 아쉬움은 컸다. 2000년 11월 사단법인인 2·28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가 설립되고 2004년에는 2·28기념중앙공원이 현재 위치인 중구 공평동에 마련됐지만 '2·28'의 의미를 아는 학생들은 많지 않기 때문.

졸업생들은 "2·28민주화운동의 근원은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 정신"이라며 "인정받지 못했던 시간만큼 2·28정신을 알리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