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느림에 대하여…'에코 투어'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역설적이게도 느림의 가치는 오히려 커지는 추세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걷기'가 시대의 새로운 흐름으로 부상하고 있다.

공기가 맑은 곳에서 높은 산이 아닌 구릉이나 유적지 일원을 여유있게 순례하면서 몸과 정신 건강을 함께 챙길 수 있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환영받고 있다. 워킹화가 판매량에서 등산화를 앞질렀다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면 걷기 열풍이 일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특히 문화유산과 함께하는 걷기 코스는 건강을 생각하는 소박한 마음과 조상의 흔적을 느끼며 듣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어우러져 있어 더 큰 만족을 얻는 것 같다.

천 년 전에도 걸어 다녔을 오래된 돌담길을, 또는 녹색 빛으로 하늘을 덮은 오솔길을, 손에 작은 수첩을 들고 안내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두런두런 걷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그대로가 아름다운 그림이어서 마음 한 구석이 편안해져 옴을 느낄 수 있다.

제주를 시작으로 걷기 여행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문화체육관광부에서도 전국의 걷기 중심길 7곳을 선정했고 각 지자체에서도 특색 있는 아이디어를 내서 올레길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강원도 바우길 등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우리 대구경북 지역도 영주 소백산 자락길을 2012년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생태관광지로 계획하고 있다 하니 매우 고무적이다. 또한 문경 옛길, 풍차와 어우러진 영덕 바닷길도 누구나 다시 걷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예전의 볼거리, 먹을거리 위주의 관광에서 걷기 여행으로의 변화는 지역의 스토리와 환경이 조화를 이룬 에코 투어로 각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수려한 경치와 우수한 문화유산을 많이 가진 우리 경북은 매력적인 걷기 여행길 조성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경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곳이다. 기존 에코 투어에 문화재를 통한 역사 교육이라는 교육적 효과까지 겸할 수 있어 '에코케이션(ecocation)'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다.

예를 들어 '선덕여왕의 흔적을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은 선덕여왕과 관련된 유적지를 걸으며 역사와 함께 하는 걷기 여행이다. 이 길은 아름다운 숲과 낮은 언덕길로 이어져있어 숲길을 걷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적지에서의 체험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역사를 전달해준다. 경주의 숨은 속살(?)을 느낄 수 있는, 느릿느릿 걷는 여정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역사와 문화가 주는 선물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올레길이 좋다하더라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점도 없지 않다. 억지스럽게 형식적인 길을 만드는 것도 문제이고 스토리 콘텐츠의 부족, 그 길을 걸으며 함부로 주위에 있는 꽃이나 나뭇가지를 꺾고,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를 버리고, 몰래 음식을 만들어 먹는 우리들의 부족한 시민의식도 문제이다. 그리고 한번 훼손되면 회복까지 엄청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자연환경인 점을 고려한다면 올레길 코스를 효율적으로 관리, 보존하는 것도 고려해야할 숙제이다

이런 걷기 열풍에 대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웬만하면 다 걸어 다녔어"라며 무슨 새삼스런 얘기냐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요즘 현대인들은 너무나 빨리 '걷기'를 잃어버렸다. 다들 빠른 게 제일이고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끈기와 참을성이 없다. 오죽하면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처음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 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걷기' 열풍은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몸은 조금 힘들지라도 먼 옛날부터 전해져온 길 위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잊어버린 이야기를 찾아내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치유하는 한 단면을 본다. 다만 그 길을 걸으며 속살에 상처를 내지 않고, 조용히, 느림의 가치를 생각하면서, 감사하게 걷는다면 더욱 고마울 텐데… 라는 생각도 해본다.

진병길 신라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