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이 있는 산동네에서 살다가, 올여름 다시 아파트가 있는 대구로 이사했다. 대충 옮겨 온 짐들을 정리하고 고층아파트의 발코니 창으로 드러나는 도심의 불빛과 차량 움직임이 뒤섞인 화사한 밤풍경을 조용히 내려다 볼 때까지는 좋았다. 문제가 생긴 것은 3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아파트 창에 기대어 창문을 열어야하나 말아야하나를 고민하는 내 모습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환기를 위해서 열어야 했지만 망설여졌다.
봄비에 복사꽃 살구꽃이 피어오르고, 천도복숭아와 석류알이 여물어가는 산촌 동네라고 항상 공기가 맑고 푸른 것은 아니었다. 과수가 심어져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수확기를 향해 온 산천에 농약이 살포된다. 그럴 때면 작업실 안팎의 창문이라는 창문은 모두 닫아걸고 황급히 산동네를 빠져나와 피난 가듯 내달린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요즘처럼 호흡이 가빠질 만큼 큰 심리적 압박감에 쫓긴 적은 없다. 그곳에서는 늘 새 소리, 물 소리,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하늘길을 날카로이 끌고 가는 매미 울음 소리조차도 소음이 되지는 않는다. 그 소리가 나른한 낮잠을 불러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러한 자연의 소리 속에는 깊은 침묵과 정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결국 내가 아파트로 이사와 창문을 열지 못하고 며칠 간 심리적 장애를 겪은 것은 자동차 배기가스에 노출된 두려움보다는 자동차들이 만든 소음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청각만큼 우리의 정서를 쉽고 강력하게 변화시키는 기관이 또 있을까. 음악을 통해서 평소에도 자주 확인되는 바이지만 아무튼 그 소음 덩어리인 자동차를 끌고 여행을 떠나보면 알게 된다. 우리나라 도로들이 방방곡곡 얼마나 잘 닦여있는지를. 그러나 그 길들은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길이 아니라 값비싼 자동차를 위한 접대용(?) 도로라는 걸 곧 눈치채게 된다. 60, 70년대 아파트가 들어서고 길치인 나 같은 여성도 속도감 있는 운전자로 거듭 태어나야만 했던 80년대를 지날 무렵, 우리 일상의 문화적 실핏줄이었던 골목길들도 흔적없이 사라져 갔다. 동네 골목은 집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표면적인 목표를 넘어선 어떤 내밀한 의미 같은 것이 숨어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산업화의 불길에 휘감겨 모든 소중한 것을 버렸다.
유럽의 기품 있는 도시들은 모두 역사와 문화가 겹쳐 시간의 지층을 이룬 골목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도시 외관의 핵심은 조화였다. 도심의 건물 높이가 고르고 건물의 색채나 건축 재료가 도시 전체의 미관을 배려하여 선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도 도시 전체 미관에 대한 기본 방향과 계획을 세우고 그 원칙을 지키며 새 건물을 짓고 리모델링을 해나간다면 아름다운 시가지를 못 갖출 이유가 없건만, 왜 그것이 잘 안 되고 있는 것일까?
대구는 내가 사랑하는 고향이지만 빛과 향기를 잃고 표류하고 있는 무취미한 도시로 폄하할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시에서 컬러풀 도시를 구호로 내걸었겠는가. 그러나 컬러풀 하다는 말은, 색채가 많다는 말은, 화가의 입장에서 돌아볼 때 색채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중심이 될 통일된 색채가 없다면 도시는 온통 시각적 소음으로 가득찰 뿐이다.
도심 아파트에서 듣는 소음이 내게 감정적, 심리적인 장애를 일으켜 한동안 호흡 곤란을 야기했듯이, 시각적 소음이 시민들의 정서를 신경질적이고 불안정하게 만들 것은 뻔한 일이다. 시민이 도시를 만들고, 그 도시는 다시 시민의 삶과 정신을 기른다고들 말하지 않는가? 차도나 거대한 건물보다도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도시 디자인을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골목길 복원도 힘을 쏟아야 할 과제이다.
곧 추석이다. 명절을 맞아 정을 나누는 가족끼리, 동무끼리 소롯길을 찾아 산책을 해보자. 그리고 가방 속에 든 수첩 뒷장에라도 기억을 되살려 스케치를 하자. 시도 한 줄 써 넣자.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우리 내부에 창조하고, 새로운 바람을 불러들여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 대구 문화 또한 다시 빛날 수 있다.
백미혜(CU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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