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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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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읍성은 임진왜란 2년 전인 선조 23년(1590)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토성으로 쌓았다가, 임진왜란 초 대구가 함락되면서 파괴되었고, 감영이 들어서게 되면서 군사적 목적으로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일제 강점 시기이던 1906년, 대구의 상권과 읍성 외곽 토지의 절반을 소유한 일본인들이 읍성을 도시발전의 장애물로 취급하며 철거를 주장했다. 이에 친일 관료이던 대구 군수 겸 경북관찰사 서리 박중양은 부산에서 비밀리에 일본과 한국인 인부 60명을 데려와 한밤중을 이용해 성벽 수개 처를 허물었다. 조정은 허가도 없이 성벽을 철거한 박중양의 죄를 물어 해임하려 했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개입으로 무마된다. 그때 이미 철거 작업이 반이 진행된 상태였고 1907년 4월, 읍성의 철거는 완료된다. 성벽을 허물고 난 자리엔 성곽을 따라 4성로(남성로·동성로·북성로·서성로)가 개통되었고, 이것은 대구의 상권을 변화시키고 일본인들이 대구의 경제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성 해체 후 성돌과 성문 등의 유적은 행방이 묘연하다. 현재는 망우공원에 복원되어 있는 영남제일관을 비롯해 달서문, 진동문, 공북문은 그 자리를 표시해주는 표지석만이 세워져 있는 상황이다.

철저한 친일 세력이던 박중양(1874~1959)은 3·1운동 진압을 지휘하였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 건국 후까지 생존해 1949년 75세의 나이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대구에서 체포되었다가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는 회고록 '술회'를 통해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고 강변하며 자신의 행위를 굽히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는 박중양이 성벽을 허물고 나온 성돌을 1개에 1냥씩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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