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할아버지 조국에 뼈를 묻을 수 있게 돼서 기뻐요."
구한말 의병장으로 이름을 날린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의 손녀인 허로자(87) 할머니. 허위 선생의 유일한 손녀인 허 할머니는 80년 만에 국적을 찾은 데 이어 고국에서 살 거처를 마련하게 됐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를 지탱한 것은 할아버지와 조국
지난달 24일 서울 구로구의 이름도 없는 다가구주택에 머물고 있던 허 할머니를 만났다. 지난 1월 12일 80여 년 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허 할머니는 6개월 만에 자신이 살던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가보훈처에서 임대주택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지만 당장 거처할 곳이 마땅찮기 때문.
150㎝도 채 안 되는 작은 키에 머리를 곱게 빗은 그는 어눌한 한국말로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돋보기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반달눈의 눈매가 무척이나 따뜻해 보였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예쁜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고 쑥스러워했다. 그 모습에서 일제를 피해 만주로 떠나야 했던 앳된 소녀의 모습이 엿보였다.
하지만 그 느낌도 잠시, 할머니의 앉은 모양새가 어색하다. 그의 나이 12살, 만주로 갔다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탈린의 소수민족 말살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면서 동상에 걸린 다리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 한다. 그래서 다리를 굽힐 수 없다. 20대 중반에 수술을 받아서 그나마 걸을 수는 있게 됐다.
할머니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일제가 그렇게 끈질기게 쫓아다닌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 사랑은 꿈도 꾸지 못했다는 그의 말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를 지탱했던 것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조국'이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꼿꼿한 자세로 당시 일들을 담담하게 기억해냈다. 조카들을 돌보는 낙으로 살던 그는 교육열이 대단했던 '고려인'들에게 고려말을 가르쳤고 러시아어도 배웠다.
◆모두가 가족 같은 조국 사람들
평생 잊고 지내던 조국에 돌아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2006년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던 한명숙 전 총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독립을 원했던 조국에 가보고 싶다"는 그를 한 총리는 한국으로 초청했다. 그렇게 80여 년 만에 조국 땅을 밟게 됐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연금도 받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마침내 국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정부기관을 찾았다. 2009년 '왕산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 뒤 곧바로 국적 회복 신청을 했다. 그러나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해서 여든이 넘은 할머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9촌 조카인 허벽(76) 씨와 8촌 여동생인 허금자(63·허겸 선생의 손녀) 씨가 허 할머니를 업고 다녔다. 지금의 다가구주택은 허금자 씨가 얻은 전셋집이다. 허금자 씨 역시 중국에서 살다가 귀국해서 국적을 회복했다.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았다. 이르면 6월 안에 그녀가 평생 살 수 있는 임대주택도 마련된다고 한다.
"제가 나라에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국적을 회복해줘서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라에서 잘 돌봐줬고 일은 다 잘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직도 만주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28일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난 허로자 할머니가 남긴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를 울린다.
"우리가 문명(文明·글을 배운 것을 뜻하는 듯함)한 것은 민족혼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고국에 와서 사람들과 섞여 고려말을 하니 모두가 가족 같고, 친척 같아서 좋습니다. 할아버지 고향에도 언제든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상현기자 subo801@msnet.co.kr
사진·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허위(許蔿·1854~1908) 선생은
한말의 의병장.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왕산(旺山)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어명을 받고 의병을 모집, 수차례 일본군을 격파했다. 의병 대장들의 모임을 열고 이인영을 원수부 13도의병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군사장으로 일거에 서울에 진입,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일제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구미시 임은동에 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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