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지난 시절 우린 당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요. 그것은 분명하지도 않고 선명하지도 않은 당신의 모습 때문입니다. 깨어질 듯 선명한 겨울이나 베일 듯이 눈부신 여름, 그리고 비록 당신처럼 짧긴 하지만 신산한 바람을 지닌 가을에 비해 당신은 그저 졸음에 겨워 툇마루를 지키던 누렁이처럼 언제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르게 와 있곤 했으니까요.
겨울은 그랬지요. 교실 한편에서 소리를 내며 끓던 주전자, 우린 발갛게 달구어진 그 난로 위에서 튀던 녹슨 물방울을 보며 한철을 나곤 했었지요. 추위에 갈라 터진 손등이 아렸지만 겨울은 그렇게 긴 시간으로 우리를 키웠어요. 여름도 그랬어요. 고향 집, 섬 마을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닷가는 늘 위태로웠지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죠. 그건 여름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동무들과 횃불을 밝히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던 게들이 이야기를 만들곤 했었어요. 우린 아스팔트 위에서 먼지를 만들며 뛰어오르던 소낙비를 맞으며 뛰어다녔어요, 그게 여름이었어요. 그러다 가을이 오고 바다로 나갔던 배들이 만선의 불을 켜고 돌아오면 우리는 그 시간의 바람이 만드는 낯선 아픔에 몸을 웅크리며 다들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지요.
하지만 당신은 겨울의 끝에서 잠깐 왔다가 여름에 금방 자리를 내어주는 찰나에 불과해 보였어요. 그저 당신이 찾아오면 어른들은 그물을 손질하며 먼바다로 떠날 준비를 하곤 했죠.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간인데도 말이죠. 우린 당신을 기다리지도 보내지도 않았지만 어쩌면 너무나 가혹했던 고향 마을의 가난이 당신으로 인해 더 아픈 것처럼 느껴지곤 했었죠. 그것은 가난이 주는 이별 같은 것 때문이었겠지요. 일자리를 찾아 가족과 함께 떠나버린 동무들의 빈 책상, 그리고 텅 빈 골목길, 당신은 몰랐지만 우린 그렇게 당신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야 마는 당신, 지난주, 출장길에 얼핏 당신을 보았어요. 기차를 기다리다가 역 광장에서 졸고 있는 노숙자들의 좁은 어깨 위에 당신은 따스한 햇살로 날아와 있었지요. 긴 겨울 내내 추위에 떨었을 그들에게 당신은 그렇게 소리 없이 와 있었지요. 고마웠어요. 그리고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왜 많은 시인들이 당신을 노래했는지를. 어린 날 이해하지 못했던 소월의 진달래를, 영랑의 모란을 이제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요. 당신은 아직도 다 오지 못했고 여전히 더디게 더디게 오고 있지만 결국은 오고야 만다는 것을 이젠 알지요. 당신으로 인해 세상이 시작되고 당신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따뜻해질 수 있다는 것, 철교 아래 시멘트를 찢고 피어나는 생명을 통해 확인합니다. 봄! 당신을 기다립니다.
전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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