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규리의 시와 함께] 내 앞에 비 내리고(신달자)

밤새 내리고 아침에 내리고 낮을 거쳐 저녁에 또 내리는 비

 내가 적막하다고 한마디 했더니 그래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계속 보여 주는구나

 고맙다, 너희들 다 안아 주다가 나 늙어버리겠다 몇 줄기는 연 창으로 들어와

 반절 내 손을 적신다 손을 적시는데 등이 따스하다

 죽죽죽 줄줄줄 비는 엄마 심부름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고 내 앞에

 춤추듯 노래하듯 긴 영화를 돌리고 있다 엄마 한잔할 때 부르던 가락 닮았다

 큰 소리도 아니고 추적추적 혼잣말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는 비

 내가 이젠 됐다라고 말하려다 꿀꺽 삼킨다 저 움직이는 비바람이 뚝 그치는

 그 다음의 고요를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표현이 막막하다

사방천지 초록의 밤이 더 적막한 거 아세요? 적막은 적막을 알아보고 적막의 귀퉁이에 슬그머니 걸터앉지요. 갈수록 시가 빛나는 이 시인의 내공이 뼈마디에 차게 닿아요. 더 불어난 적막을 껴안고 한동안 묵묵히 있다 보면 적막으로도 등허리가 뜨뜻해 온다하네요. 누군가가 내려준 측은지심인지요.

여기 어떤 적막이 몇 날을 줄곧 내리는 비를 보고, 그 비는 또 몇 날 적막만을 바라보고 있네요. 하도 적막해서 비에 의지하는 저 심연을, 웅크린 저 육체를 어떻게 구해줄 수 있을까요.

고기를 잡았으니 통발은 버려졌고, 강을 건넜으니 배는 되돌아 간 것. 생의 의미가 간절해서 일찍이 유희는 버렸던 것인데, 그 자리 적막을 부른 건 아아 누구의 탓도 아니니.

간신히, 절명처럼 견디고 있는 날들. 내리는 저 비마져 뚝 끊긴다면, 그 다음 찾아올 고요를 견딜 예비는 없는 것이죠. 그러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내 곁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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