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면 성찰행, 둘이 오르면 대화행, 셋이 가면 친교행. 사실 등산에 정원(定員)은 없다. 혼자 오르든 단체산행이든 그것은 개인별 선호문제이기 때문이다. 철쭉이 만발한 봄 산행이나 가을 단풍 길은 혼자 걷기에 조금은 청승스럽다. 감동은 공명(共鳴)한다. 이런 곳은 비경을 함께 나눌 대상이 필요하다. 인파에서 자유로운 호젓한 산길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기 좋다. 이럴 때 길은 사색의 공간이다. 그런 면에서 청도 운문산은 솔로산행에 적합한 산이다. 20여리 한적한 숲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운문산은 등자(登者)를 간섭하지 않는다. 그저 평안히 오르라고 산문(山門)을 활짝 열어 놓을 뿐이다. '구름의 문'(雲門)을 활짝 열고 운문산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보자.
◆영남알프스 27산 중 두 번째 높은 봉우리=영남알프스는 운문령을 경계로 동쪽에 고헌산을 융기시키고 서쪽으로 가지-운문-억산-구만산을 일으켜 세웠다. 험산, 준령으로 소문난 영남알프스지만 서쪽 능선은 다른 산계(山系)보다 고봉이 많이 늘어서 있다. 전체 27산 중 최고봉인 가지산(1,241m)과 제 2봉 운문산(1,195m)이 자리하고 있다.
운문산은 '구름의 문'으로 드는 산이다. 청도 매전들에서 데워진 공기가 운문령을 넘으면서 찬공기와 만나 습기를 머금은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주위에 상운암, 운곡, 운문사 등 구름과 관련된 지명들을 만들어냈다. 운문산은 1983년부터 자연휴식년제에 묶여있다. 운문사 쪽 등산로는 모두 막혀 있는 상태.
청도군은 곧 기본계획을 수립해 동호인들의 등산수요와 환경단체의 생태계 보전 주장이 조화를 이룬 종합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청도 쪽 등산로가 모두 막힌 상태에서 등산로는 밀양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운문령에서 시작해 가지산을 거쳐 오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운문산-억산까지 연결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취재팀은 석골사를 지나쳐 산으로 들어섰다. 석골사는 통도사의 말사로 신라 말기의 선승 비허(備虛) 스님이 창간한 사찰. 절 입구에는 10여m 높이의 석골폭포가 버티고 서있다. 계곡물이 차고 맑으며 물소리가 비길데 없이 시원스럽다. 하산길 산객들에게 훌륭한 탁족처를 제공하고 있다. 석골사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면 이내 등산로다. 오른쪽에 계곡을 끼고 경사로를 오른다. 초여름 더위는 길 옆 울창한 활엽수림에 맡긴다. 등산 1시간여 만에 오늘 첫 봉 억산(億山'954m)에 올랐다.
◆억산 '깨진 바위'에는 슬픈 이무기 전설이=억산은 구만산과 운문산을 이어주는 중계점이고 남북으로는 청도 운문면과 밀양의 문바위-북암산을 연결해주는 교통로다.
억산을 명품 산으로 데뷔 시킨 1등공신은 '깨진바위'. 이 바위는 정상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954봉과 946봉 양편에 20여m의 홈이 패여 있고 칼로 내려친듯한 단애(斷崖)는 높이만 130m에 이른다. 이 바위엔 용이 되려다 좌절한 이무기 전설이 얽혀 있다.
억산에서 오른쪽으로 난 하산길을 택해 뚝 떨어져 잠시 오르면 팔풍재와 만난다. 이 재는 옛날에는 운문과 밀양의 산내를 잇던 교역로였고 석골사와 대비사를 왕래하던 스님들의 구도 길이었다. 지금은 재의 기능이 끊겨 버린 상태다. 가끔씩 대비사 쪽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이 흐릿한 등산로를 더듬어 오르내릴 뿐이다.
팔풍재에서 30분 쯤 오르막길을 오르면 범봉(962m)에 이른다. 옛 지도에는 이곳이 호거산(虎踞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범봉 이름은 아마도 호랑이(虎)에서 따온 듯하다. 허술한 정상석 앞에 헬기로 공수한 돌더미가 얹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곧 폼 나는 정상석이 만들어질 것 같다.
다시 산길은 딱밭재로 이어진다. 딱밭재는 옛날 주변에 닥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 한자로는 저전(楮田)으로 표기된다. 닥나무는 한지의 원료로 쓰인다. 이 나무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경작이 쉬운 평지 내려갔거나 기계로 찍어낸 종이에 밀려 사양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정상에 서면 밀양 산내들 너른 품 한눈에=딱밭재에서 숨을 고른 후 다시 운문산을 향해 올라선다. 오늘 등산의 두 번째 난코스다. 표고 차는 400m에 불과하지만 급경사로 이루어진 탓에 체력소모가 크다.
서늘한 기운이 몰아친다 싶더니 커다란 정상석이 눈앞을 막아선다. 정상의 난간에 다가 선다. 탁 트인 사방, 산군(山群)들의 파노라마, 역시 운문산은 영남알프스의 준봉이었다. 유럽의 알프스산맥을 본떠 국내 20여 곳에서 차용하고 있다는 알프스브랜드. 각기 특징이 있겠지만 영남알프스야말로 한국 최고의 산군(山群)으로 손색이 없을 듯하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산내들 풍경도 압권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들에서 산을 넉넉히 받쳐주는 평야의 여유를 읽는다.
정상 컷을 몇 장 렌즈에 담고 하산 길로 접어든다. 다시 딱밭재로 넘어와 거기서 천문지골을 탄다. 물론 이곳은 자연안식년 구간으로 운문사 쪽에서 입산은 금지되어 있다.
그동안 고립된 탓인지 골을 급하고 거칠다. 아마도 30년 가까이 폐쇄된 탓일 것이다. 1시간여를 내려오면 비로소 평지와 만난다. 아마도 운문산에 생태탐방로가 열리면 천문지골이나 심심골이 가장 유력한 후보지가 될 것이다. 이 길은 문수선원을 지나 운문사로 연결된다.
한적한 등산로, 길이 편해지니 이제 머리는 사색에 든다. 생각은 새울음소리를 따라 비상하고 상념은 야생화 향기를 따라 흩어진다. 계곡 물소리에 상념을 씻으려는데 어디서 '좋은 산행 하셨습니까'라는 맑은 음성이 울려 퍼진다. 굵은 뿔테 뒤로 붉은 뺨. 저녁 산책을 나온 승가대학의 여승 같았다. 한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세상과의 '끈'은 이어 둔 듯 했다.
금남(禁男)의 영역에 든 낯선 불청객을 내쫓지 않고 좋은 인사로 일갈한 비구니의 일침(一針)에 괜히 멋쩍어진다. 괜한 잡풀만 걷어차며 서둘러 산길을 빠져 나온다.
◆운문산 대중교통으로 연결돼요=동대구에서 밀양 가는 무궁화호(오전 9시 25분 출발 열차 추천)를 타고 밀양역 앞(건너지 말고)에서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터미널에서 남명리행 버스를 탄다.(10시 40분차와 연결) 석골사 입구에서 내려 마을 진입로를 10분쯤 오르면 석골사가 나온다. 귀갓길은 역순으로 하거나 청도 쪽 심심이골이나 천문지골로 내려 운문사 시외버스정류장으로 내려오면 된다. 대구 남부정류장행 막차는 오후 7시 40분 출발.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