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아버지를 위하여

지난 오월 연재를 시작할 때 썼던 글이 '어머니의 경전'이었다. 평생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던 그 어머니가 일주일 전 척추골절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더 큰 문제는 홀로 시골집에 남겨진 아버지였다.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쇠처럼 무겁고 가슴 아팠다.

아버지-그는 정말 그토록 강한 남자였던가. 어머니의 부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당황해하는 모습은 허허벌판에 서서 어찌할 줄 모르는 아이 같았다. 어린 시절, 전형적인 순종형의 어머니 앞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그 모습에 기가 죽어 우린 감히 말대꾸도 할 수 없었던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이젠 문을 닫아도 자꾸 바람에 덜컹거리는 빈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원형적인 존재의 허약함을 알기에, 겉으로는 더 강하게 보임으로 그 위엄을 유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회학자들이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위기의식과 더불어 몰락이라고까지 하는 요즘, 더욱 아버지(남자)들의 모자는 종이처럼 얇아지고 있다.

부성(父性)을 '인위적인 문명의 창조물'이라고 말한 이탈리아 태생의 정신분석학자 루이지 조야는 저서 '아버지란 무엇인가'에서 남성성의 모순과 투쟁과정을 통해서 아버지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한다. 아버지가 탄생한 선사시대부터 출발해 오늘날 아버지가 가정에서 실종된 상황까지 역사적이고 심리적이며 문화적인 원인들을 분석하고 있는데, 기본적인 관점은 아버지란, 단순한 혈통관계가 아닌 문명이 창조해낸 산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궁 속에 아이를 임신함으로써 새 생명과 온몸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식과 직접적인 신체접촉의 경험이 없는 부성은 자연 발생이 아니라 인위적 문명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문명의 변화와 역사적인 생성과 소멸이 거듭하는 환경의 지배 아래서 아버지라는 존재의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역사는 부성과 남성성의 모순과 투쟁 속에서 퇴행하거나 진보해온 것이 사실이라 해도, 내 앞에 선 아버지의 한없이 쇠락해 가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세상 모든 아버지를 위하여 시 한편으로 연재를 마무리하고 싶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의 '아버지 마음')

강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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