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서바이벌 공화국, 대한민국

전국이 서바이벌 오디션으로 들끓는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는 '서바이벌 데이'다. TV를 켜면 케이블은 물론 지상파 방송까지 1등을 가려내기 위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들이 시청자들을 불러들인다. 혹시나 싶어 채널을 돌려도 헛고생이다. 마땅히 볼 것이 없기 때문에 TV를 끄지 않는 이상 채널 돌리기를 되풀이하게 된다. 현재 방송중인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줄잡아 10여 개 이상. 분야도 다양하다. 예비가수에서 기성가수, 다자이너, 아나운서, 요리사, 스포츠댄서, 슈퍼모델, 오페라가수, 밴드는 물론 대학생 토론 배틀(battle)까지 영역이 확산되고 있다. 오는 10월에는 'PD 서바이벌 오디션'도 등장한다고 한다. 방송사들은 서바이벌 오디션 열풍을 '거부할 수 없는 시대 흐름'이며, 2006~2007년 붐을 일으킨 리얼 버라이어티를 대체할 프로그램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이러다가 좋은 교사나 부모, 사랑스런 자녀, 훌륭한 정치인을 선발하는 서바이벌까지 생겨나겠다.

서바이벌 오디션 열풍은 지난해 엠넷(Mnet) '슈퍼스타 K' 시즌2에서 비롯됐다. 이 프로그램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30만 명의 참가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명에게 수억원의 상금과 자동차가 상품으로 주어졌다. 또 음반을 내고 가수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됐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혹독한 현실에서도 꿈을 좇는 도전자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진한 감동을 받고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이런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환풍기 수리공인 허각과, 중국 옌볜의 20대 무명가수 백청강이 어떻게 코리안 드림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춤 실력과 비주얼을 갖춘 '아이돌'이 대세인 가요계 현실에서 두 청년을 발굴하고 기회를 준 이 프로그램은 꿈을 잃은 청소년, 좌절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가슴 뭉클함은 여기까지였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자 국내 방송사들이 앞다퉈 유사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넘침은 모자람보다 못한 법. 치열한 시청률 경쟁이 뒷따랐다. 과열 경쟁은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쥐어짜내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가수의 열창에 지나치게 흥분하는 방청객의 모습과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만을 골라 크게 내보내는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짜증이 날 정도이다. 다분히 의도된 인상을 주는 듯한 이런 편집은 감정의 자연스런 흐름을 차단시키기까지 한다.

특정 프로그램의 집중 편성으로 인해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권'은 더욱 위축되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 '막장 드라마'까지 판을 치고 있는 마당에 서바이벌 프로그램들까지 중요 시간대를 점령하고 있다. 교양'시사 프로그램을 시청하려면 두 눈 부릅뜨고 밤늦은 시간까지 버텨야 한다. 방송, 특히 공영방송은 국민들에게 교양과 자기계발, 공동체의 주요 관심사 등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토론의 장을 마련할 공적 책무가 있는데도 오로지 시청률에만 목을 매는 것 같다.

물론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스코리아를 비롯한 각종 미인선발대회, 모델선발대회, '전국노래자랑'을 비롯한 가수선발대회는 물론 '장학퀴즈' '퀴즈아카데미' 같은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런데 왜 최근에 사람들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새삼 열광하는 것일까? 문화평론가들은 이런 현상에는 '1등 주의' '승자독식'(勝者獨食)이란 현실이 반영됐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TV를 보면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의 자화상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잠시 한눈팔면 대오에서 탈락하고 남을 눌러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우리사회는 경쟁이 일상화된 '서바이벌 오디션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취업난과 사회 전반의 양극화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서바이벌 오디션은 경연자(도전자)의 멋진 모습을 통해 무기력과 패배감에 젖은 대중들에게 대리만족과 현실의 도피처를 제공하고 있다. 어쩌면 '부지불식중에 이 땅은 기회의 땅이며,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멋진 삶이 보장된다'는 인식을 청소년들에게 심어줄 수도 있다.

서바이벌 오디션의 도전자들의 삶과 열정은 분명 아름답다. 하지만 서바이벌 오디션 광풍은 현실의 부조리를 잊게 하는 '매직'(magic)이며, 경쟁과 획일성을 강요하는 '폭군'이다.

김교영(특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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