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 가족 이야기] 어머니의 놋그릇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종갓집 종부로 시집을 오신 나의 시어머니는 70년 세월을 그곳에서 사셨다. 시부모 섬기는 일이나 집안 대소사, 일 년이면 열두 번씩 올리는 제사에도 소홀함이 없으셨다. 종갓집 음식은 맛 좋기로 소문이 났었고 마디가 굵은 어머니 손에서는 늘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떠나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시댁에서 시제를 지내고 그릇을 정리할 때였다. 나무 궤에는 쓰지 않고 쌓여 있는 놋그릇이 가득했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놋그릇들은 지난 세월의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 듯했다. 어머니는, 놋그릇 몇 개만 달라는 내게, 그걸 가져다 무엇에 쓰려느냐? 하시며 골라 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중에서 펑퍼짐한 합, 둥근 밥 주발과 대접, 작은 술잔 몇 개, 그리고 뚜껑 달린 앙증맞은 종지 등을 골랐다.

결혼을 하고 종갓집 막내며느리가 되어 처음 시댁에 갔을 때도 어머니는 그 놋그릇에 밥상을 차려주셨다. 내가 가져갈 놋그릇을 가방에 담자 어머니는 대견한 듯 지켜보셨다.

오늘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가 즐겨 해 주시던 약식을 솥에 안친다. 밤, 대추, 잣이 어우러진 갈색의 밥알들은 뽀얀 김을 토하며 반드르르 윤이 난다. 낮 동안 열심히 닦아 놓은 놋대접에 따뜻한 약식을 정성스레 담는다. 놋대접에 담긴 약식을 보며 치자빛 생모시 한복이 잘 어울리던 단아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다.

남편은 약식을 먹으며 어머니 이야기를 할 것이다. 놋그릇에 서린 어머니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그 속에 깃든 깊은 뜻을 되새길 것이다. 머지않아 나도 며느리를 얻게 될 것이고, 어느 날 며느리는 이 놋그릇에 대해 나에게 물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놋그릇에 스민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박옥자(대구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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