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서로 맞닿아 있다고 합니다.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우리는 잊고 삽니다. 사실 늘 죽음을 떠올리며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삶 속의 행복을 추구하고, 그 삶이 끝나는 죽음은 행복과는 무관하다고 여깁니다. 여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호스피스병동입니다. 그곳에도 행복이 있을까요?
섣부른 예단은 금물입니다. 비록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노래한 시인처럼 될 수는 없을지언정 슬프고 외롭고 무서운 죽음만이 기다리는 곳은 아니라고 합니다. '죽음'이 아닌 남아있는 아름다운 '삶'을 돌본다고 말하는 호스피스병동 의사 김여환 씨의 글을 통해 '행복한 삶, 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한 번쯤 되새겨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 글은 삶의 끝에선 이들을 돌보는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언젠가 떠나보내야 할 가족과 그것을 지켜볼 우리, 그리고 오늘과 내일의 행복에 대해 고민해 보겠습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호스피스병동서 자원봉사 그들…떠나가는 이들과 아름다운 이별
4년 전 양을천 회장님을 처음 만났다. 살짝 벗겨진 대머리 탓에 실제(63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보인다. 그러나 올여름에도 2박 3일 지리산을 종주할 만큼 건강하다. 그는 몸만 건강한 것이 아니었다. 막내 아이가 4살 때 직장암으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을 갖고 있다. 그런 세월의 풍상과 인간에 대한 풍부한 애정은 그의 노년기를 명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한 기업에서 정년퇴직한 그는 뜻한 바 있어 호스피스봉사를 시작했다. 다른 직장에서 섭외도 있었지만 봉사도 너무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선뜻 호스피스에 나섰다. 아내가 떠났을 때 다짐한 약속도 지켜야 했다. 요양사 자격증도 따고, 호스피스봉사자 교육도 받았다. 월'목요일은 환자 목욕봉사를 하고, 월'목'금요일에는 체조교실을 연다. 병동 내 힘든 문제도 풀어준다. "언제나 긍정적으로 보라"며 명쾌한 해답을 주기도 한다. 늘 듣는 말이지만, 몸소 실천하는 그의 말은 진리 그 자체다.
그는 기독교인이다. 먼저 떠난 아내가 인도해 준 하나님의 나라를 열심히 믿는다. 그렇다고 봉사와 종교생활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는 결혼한 딸이 담석증 수술로 입원하자 봉사를 미루고 간병할 만큼 자식 사랑도 애절했다.
매주 금요일에는 박순희 여사와 남편 최주영 씨가 찾아온다. 박 여사는 만돌린 연주가이고, 남편은 연주를 잘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자식을 키워놓고 일주일에 하루는 남을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굉장히 성실한 부부다. 봉사를 시작한 지 4년간 그녀가 오지 않은 날은 지난달 유방암 수술을 받을 때와 항암치료 부작용으로 힘들었을 때 딱 두 번뿐이었다.
그동안 박 여사의 만돌린 연주 솜씨는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환자 반응이 좋았던 곡을 꼼꼼하게 적어두기도하고, 편곡이 잘못된 악보는 인터넷에서 다시 내려받아 연주했다. 14병상의 작은 병동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듣고 있다고 한 번도 허투루 연주한 적이 없다. 임종 단계에 들어간 환자가 많아 병동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날이면 일부러 잔잔한 곡을 연주했다.
가끔 사랑싸움도 했지만 유방암 수술을 한 뒤부터 그런 티격태격도 없어졌다. 원래 호인(好人)이던 남편은 그녀에게 더욱 애틋한 애처가가 됐다. 그녀는 아직 오른쪽 겨드랑이에 임파선 절제로 약간의 통증을 호소한다. 아직 8차례나 항암치료가 남아있는 환자이면서도 씩씩하게 음악 봉사를 한다. 금요일마다 들리는 만돌린 선율은 천사들의 음악소리로 들린다.
호스피스 수기공모전에 당선돼 보건복지부 장관상까지 받은 황철환 씨는 우리 병동 행복봉사단의 든든한 기둥이다. 그에게서 부드럽게 한 시간 정도 발마사지를 받은 환자들은 모두 곤한 잠에 빠진다. 그가 다녀간 날은 마약성 진통제 처방을 적게 해도 된다. 발마사지는 생각보다 중노동이다. 환자 한 분의 마사지를 마치면 온몸이 땀에 절어있다. 그를 보면 먼저 떠난 그의 형님이 생각난다. 간암에 걸린 그의 형님은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였다. 형수가 사정이 있어 간병을 못하자 그가 형님 수발을 책임지게 됐다. 형님을 간병하며 처음 호스피스를 경험했고, 그때까지 대충 살아온 삶이 진지하게 바뀌었다고 했다. 형님이 간성 혼수가 돼 임종실로 옮겨야 한다고 했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큰 덩치에 베개를 들고 침대를 따라가면서 꺼이꺼이 울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하면 잘해 드린 것도 없는데. 황철환 씨를 우리 병동에 보내준 그의 형님이 고마울 따름이다.
글=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 센터장
정리=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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