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농사(農事)라는 말이 있다. 때맞춰 씨앗을 뿌리듯이 제때 공부를 시키고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며, 알맞게 물과 거름을 주어 낱알을 튼튼하게 하듯 적당한 채찍과 훈육을 통해 인간다운 사람을 만들고자 하는 일이 농사짓는 것과 같이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작물 농사는 정성을 들인 만큼 소출을 얻는 데 비해 자식 농사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누구나 바라는 일이기는 하지만 쉽게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자식 자랑은 아내 자랑과 함께 금기시되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대다수 그렇지 못한 아버지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5형제를 대과에 급제시킨 자랑스러운 아버지상을 가진 행정(杏亭) 박눌(朴訥'1448~1528)이 심었다는 수령 500여 년의 상주 이안리 은행나무를 찾아가는 마음은 약간 들떠 있었다.
박눌은 본관이 함양으로 1448년(세종 30) 성주군 선남면 오도종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아버지 박소종(朴紹宗)이 상주 이안으로 이거할 때 함께 갔다. 어릴 때부터 효성이 깊고 성품이 온화하며 의지가 굳어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과거에 급제하고 창락도 찰방(昌樂道 察訪)을 지냈다. 창락도는 오늘날 풍기 일대에 있었던 역원(驛院)으로 순흥, 영주, 봉화, 예천, 안동, 예안의 간이역을 거느린 경상도 북부지역의 큰 역이었다. 찰방(종육품)은 곧 역장을 말한다.
공의 아들을 위한 교육방식은 좀 독특했는데 원두막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워 못 내려오게 해 공부를 계속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성과 노력으로 맏아들 거린(巨鱗)은 1504년(연산군 10)에 급제해 장령을 지냈고, 둘째 형린(亨鱗)은 1516년(중종 11)에 이조참의, 셋째 홍린(洪鱗)은 1522년(중종 17)에 대사헌을 지내고, 넷째 붕린(鵬鱗)은 1533년(중종 28)에 한림, 시강원 설서, 다섯째 종린(從鱗)은 1532년(중종 27)에 이조정랑을 지내 5형제가 모두 나라의 기둥으로 성장했다.
특히, 막내 종린(1496~1553)은 벼슬을 그만두고 처의 고향인 예천 용문면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의 한 곳인 금당실에 자리 잡아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문집이나 유고를 남긴 사람만 하여도 40~50명이 된다고 한다. 대과 급제자 한 사람만 나와도 가문의 영광이었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주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을 것이다.
이를 두고 예조, 공조판서를 지낸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1491~1570)은
세상에 아들 다섯 낳기도 어렵고:세지생오자난(世之生五子難)
다섯 아들이 급제하기도 어렵고:오자등과난(五子登科難)
다섯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기도 어렵다:오자구문난(五子俱文難)
삼난가(三難家), 즉 하기 어려운 일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한 집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공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띠집, 즉 모정(茅亭)을 짓고 여기에 은행나무를 심고 자호를 행정(杏亭)이라 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우헌 채헌징(蔡獻徵'1468~1726)은 '적덕(積德)한 군자요 교육을 즐기는 현명한 스승'이라고 했다. 성공의 배경에는 아내인 정부인(貞夫人) 김씨의 역할도 컸으리라 짐작된다.
김 씨는 '우리 집에는 아무런 보물이 없으나 오직 청백의 마음가짐만이 보배일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고 한 안동인 보백당 김계행(1431~1521)의 두 딸 중 한 분이다. 다른 딸은 풍산인 류자온에게 시집갔는데 명재상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증조할머니이다.
1528년(중종 23)에 돌아가시니 향년 81세, 왕이 사제문(賜祭文)을 보냈다.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고 상주의 청암서원과 예천 금곡서원에 배향되었다.
공이 심은 나무는 마을 뒤 높은 언덕에 잡목과 어울려 있었다. 촌로께서 가르쳐주지 아니하였으면 찾지 못할 만큼 외진 곳이고, 또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원줄기는 죽은 것 같고, 부분적으로 썩기도 했으나 수세는 강건했다.
한적한 시골, 한미한 집안에서 다섯 명의 아들을 모두 대과에 합격시켜 고을과 가문을 빛낸 분이 심은 나무라고 보기에는 대접이 너무 소홀한 것 같다.
그냥 크고 우람한 오래된 나무라도 보호수 아니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나라로부터 보호받는데 스스로 호(號)로 삼을 만큼 공의 애정이 깃들어 있는 나무가 그냥 방치되고 있었다. 종자를 받아 묘목을 길러 금곡서원 등에 심어 공의 뜻이 오래 후손들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