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정은 한번도 얼굴을 드러낸 일이 없다
노련한 알피니스트들도
그 발밑에서 점심이나 먹고
돌아올 뿐이다.
그 미립자의 얼굴은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죽은 나의 발톱에서나
뛰는 심장에 이르기까지
움직이고 있는 그 무엇이란 것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그 우주의 벽은
어디쯤에서 닿을 수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지금 보내고 있는 가장 강한 전파로도
다만 은하계와 은하계가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만
추측할 뿐이다.
정상에서는 정상을 볼 수 없고 계곡에선 계곡을 알 수 없다. 행복은 행복이 지나간 다음에 알 수 있고, 사랑도 사랑을 잃은 후에 알게 된다는 말과 같다. 시詩가 그렇고 시법詩法이 그러하다. 시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직접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발밑에서 점심이나 먹고 돌아올 뿐'. 그게 시의 말, 시의 뜻.
'산정은 한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 없다'는 첫 행에 모든 암시가 있다. 에둘러 말하기, 넌지시 말하기, 비유하고 암시하기, 무엇보다 극과 극이 하나라는 걸 알게 하기. 말하자면 종이는 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랑은 사랑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종이는 나무와 바람과 햇빛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토록 열망하던 사랑은 의심과 불안과 이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아는 일. 거기서 출발하는 일. 시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인 것을. 도대체 우주의 어디쯤 우리가 있다는 것일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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