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삼성 라이온즈 사령탑을 맡은 김성근 감독은 이따금 경산에서 대구시민운동장까지 마라톤 수준의 달리기 훈련을 강행했다. 극기 훈련이었다.
그때마다 가장 늦었던 선수는 강기웅이었다. 그는 뛰다가 지치면 걷고, 걷다가 지치면 버스를 타고 들어왔다. 김 감독은 자신의 스타일에 잘 따르지 않는 강기웅을 자주 입방아에 올렸고, 그는 어느 순간 훈련에 성실하지 않는 선수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강기웅은 고교시절부터 도루 시에 필요한 강력하고 빠른 스타트와 주루 스피드를 위해 앞발로만 걷고 뛰는 단거리 위주의 연습을 습관처럼 해왔던 터라 뒤꿈치를 함께 써야 하는 장거리 달리기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대표 시절 태릉선수촌의 체력 테스트에서도 장거리는 늘 꼴찌였지만, 바벨은 160㎏이나 들어 올려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몰래 연습을 통해 준비해 두지만 눈에 들기 위한 소모성 훈련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했던 주관이 뚜렷한 선수였다. 때때로 성격과 행동이 보통사람과 달라 기인(奇人) 같아 보이는 야구인이 바로 강기웅이었다.
일반적으로 잘 맞지 않는 슬럼프 때 연습량을 늘려 극복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는 반대였다.
잘 맞을 때 오히려 밤을 새울 정도로 연습량을 늘려 타격감을 유지했고, 반대로 잘 맞지 않을 때는 쉬면서 마음을 편안히 가다듬고 체력을 보충했다.
타격에 관한 끊임없는 연구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헤드스피드 증진 훈련도 주로 방안에서 연습하며 터득했다.
한 번의 스윙마다 반복해 생각하며 매일 300개 이상의 스윙연습을 한 끝에 짧은 스윙으로 강한 타구를 만드는 타법을 완성해 낸 것이었다.
키 172㎝로 야구선수로는 체격이 작은 그가 5연타석 홈런의 대기록을 수립한 것은 이 같은 훈련 덕분이었다.
독특한 훈련 방식 때문에 눈에 보이는 훈련을 게을리 한다는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책임감이 강해 실전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아 부상도 많았다.
늘 생각하는 야구가 그의 모토(신조)였다.
더 많은 루를 정복하고 더 많은 아웃카운트를 잡고 더 좋은 타구를 날리는 것이 목표였던 선수생활이었지만, 섬세하고 과감했던 만큼 부상이 뒤따라 원하는 만큼의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1996년 현대로의 트레이드가 발표되자 유니폼을 벗었던 것은 구차하게 선수생활을 연명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회인으로 돌아가 최선의 삶을 살았다.
병원 사무장으로 일했던 그는 지난해 15년의 외유를 접고 야구계로 돌아왔다. 삼성 라이온즈의 유니폼을 다시 입은 것이다.
오랫동안 야구계를 떠났던 사람이 돌아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코치로서 강기웅의 진가가 빛나기를 기대한다.
야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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