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직도 벽에 落書? 스마트폰 SNS '樂書' 터치! ㅋㅋㅋ

1975년 6월 연세대학교 반피득'정우현 교수는 이색 논문을 발표했다. 제목은 '낙서 분석에 나타난 캠퍼스 성향'. 3년 동안 연세대 학생회관에 낙서집과 낙서판을 비치해 학생들이 자유롭게 낙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수집한 990여 쪽 분량의 낙서집 6권과 낙서판 170여 장에 실린 낙서 1천520여 건을 분석한 것.

내용별로 분류했더니 사랑'연정'성(sex)'여성'결혼 등 '사랑' 관련 낙서가 가장 많았다. 시'콩트'음악 등 '문화' 관련 낙서는 2위였다. 3위는 신(神)'삶'죽음 등 '인생 문제' 관련 낙서였고, 교수'수업 등 '학교생활' 관련 낙서는 4위였다.

반 교수는 "무의식적 표현이 담겨 있기 때문에 낙서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함께 이 연구에 참여한 이규호 교수는 "낙서는 형식을 갖춰야 하는 수필, 서신 등에 비해 마음에 맺혀 있는 진실을 더욱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에 참여한 다른 교수들도 "낙서에서 어떤 중요한 정보를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캠퍼스라는 작은 사회의 심층 구조와 저류를 파악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낙서,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30여 년 전 캠퍼스 낙서는 당시 젊은이들의 내적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요즘 캠퍼스 낙서는 어떤 모습일까?

취재진은 이달 9일 대구 계명대 한 강의동의 남자화장실 6곳과 강의실 4곳을 샅샅이 뒤졌다. 요즘 대학생들이 남긴 낙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화장실 벽면에는 낙서 대신 취업 관련 웹사이트 홍보 스티커 등이 몇 곳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강의실 책상에는 멋진 소설 문구나 영화 대사 또는 커닝용 시험 답안 등이 가득 적혀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깨끗했다. 대학생 장모(21'여) 씨는 "강의실 책상에 앉아있을 때 두 손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을 하는 데 쓴다. 내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익명으로 퍼뜨리는 것이 낙서다. 낙서를 이젠 온라인에서 마음껏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캠퍼스는 물론 우리 사회 곳곳의 오프라인 낙서는 온라인으로 자리를 옮겨가고 있다. 디시인사이드 등 네티즌들이 몰려드는 인터넷 유명 커뮤니티가 대표적이다. 디시인사이드 웹사이트에는 1분에만 수십, 수백여 건의 글이 올라온다. 대부분 형식이 갖춰진 장문이 아닌, 몇 글자 혹은 몇 문장 정도의 단문이다. 반말 투의 글도 많고, 외계어(?), 은어, 인터넷 줄임말 등으로 가득하다. 디시인사이드에 수시로 접속하는 '디시 마니아'인 대학생 박모(26) 씨는 "네티즌들은 디시인사이드에서 글을 작성할 때 '쓴다'고 하지 않고 '배설한다'고 표현한다. 낙서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인 셈"이라며 "나의 낙서를 다른 네티즌들에게 퍼뜨려 '히트'시키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1980, 90년대만 해도 낙서는 오프라인에서 충분히 히트할 수 있었다. 대통령 등 권력자들을 소재로 희화화하고 풍자하는 낙서가 인기를 끌었는데 출처는 대부분 화장실 낙서였다. 하지만 요즘 눈길을 끄는 희화와 풍자의 낙서는 대부분 인터넷이 출처다. 예컨대 네티즌들은 어떤 사회 이슈가 있을 때 관련 인물 사진을 영화 포스터, 미술 작품 등과 합성한 일종의 패러디 낙서를 쏟아낸다. 또 인기 영화나 드라마의 대사를 인용해 조롱하는 낙서를 인터넷상에 끄적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오프라인 낙서는 이제 더 이상 활력적으로 생산되지 않는 상황. 옛 낙서는 박제돼 아련한 추억으로 남고 있다.

대구 북구 경북대 인근 돈가스 전문점 '지구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지구인만 출입. 외계인 출입금지'라는 큼지막한 낙서가 웃음을 짓게 만드는 이곳 내부는 양쪽 벽이 낙서로 가득하다. 대부분 손님으로 온 대학생들이 남긴 것이다. 단순히 방명록을 남긴 것부터 연애담, 학교 수업 등 관련 이야기까지 빽빽하다. 이곳을 찾은 최혜정(21'여'경북대 신문방송학과 2학년) 씨는 "학번이 10년이나 차이 나는 학과 선배님이 적은 낙서를 발견했다. 신기하다"고 말했다. 11년째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주인은 "낙서를 지울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음식 맛도 중요하지만 두고두고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추억의 맛도 선사해야 한다"며 "하루는 젊은 부부가 찾아왔는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알고 보니 둘은 대학생 때 CC(캠퍼스 커플)였고, 당시 함께 새겨 둔 낙서를 보러 지금도 종종 음식점을 찾는다"고 말했다.

◆즐기는 문화가 된 낙서

길거리 낙서는 그 자체가 문화로 인식되고 있는 추세다. 대표적인 것이 그래피티 문화다. 그래피티(graffiti)는 이탈리아어로 '긁기'라는 뜻인 'graffito'의 복수형이다. 주로 스프레이 페인트로 도심 벽에 글이나 그림을 새기는 그래피티는 미국 내 흑인 등 소수 인종의 저항 도구에서 그 자체로 도심을 환히 밝히는 공공미술로 인식된 지 오래다.

대구에서는 약령시 등에서 스토리텔링 벽화 작품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벽면에 새겨지는 모든 것을 '낙서'라고 본다면, 요즘 대세는 쉽게 휘갈기는 낙서에서 공들여 그리는 낙서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낙서는 문화인이기를 포기한 행위'라는 표현은 조금 수정될 소지가 생겼다.

낙서는 예술작품의 실험적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대구미술관 디아티스트전에서 한무창 작가는 '무제'라는 제목의 대형 낙서 작품을 전시했는데 종이에 볼펜으로 그린 수많은 선과 동그라미 낙서가 가득 채워져 있다. 작가는 유학시절 독일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종이 위에 단어를 빽빽하게 적고 외워질 때까지 줄을 치고 원을 그리기를 반복했던 것에서 작품을 착안했단다.

미국 낙서전문가 노튼 마크리지는 "낙서를 하는 순간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낙서의 변천사를 살펴보니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낙서(落書)는 ▷'장난으로 아무 데나 함부로 쓴 글씨나 그림'이라는 1차적 의미에서 나아가 ▷'풍자나 조롱의 뜻으로 눈에 띄기 쉬운 곳에 시사나 인물에 대해 쓴 글이나 그림'이라는 의미로 발전하며 우리 사회를 표현했고, 이제는 ▷'떨어질 낙(落)'에 '즐길 락(樂)'의 의미도 포함하는 인간 유희의 도구로 변화하고 있다.

◆게시판, 개인의 도구로

낙서는 처음부터 '개인'에 방점을 찍었다. 자기 발언과 생각을 새기되 공적으로 책임지지는 않았다. 반대로 '게시판'은 '공공'에 방점을 찍었다. 대표적인 것이 대학 게시판의 대자보 문화였다. 학내는 물론 사회 이슈와 관련된 의견을 커다란 종이에 써서 게시판에 붙였다. 대자보를 통해 대학이라는 작은 사회의 여론이 모이고 또 퍼지며 숨 쉬었다.

하지만 요즘 대학 게시판은 개인의 '필요'에 방점을 찍는다. 각종 자격증과 공무원 시험 등 취업 관련 정보와 공모전 안내 등 스펙 쌓기 정보만이 가득하다. '모두'의 소통을 다루는 정보는 찾기 힘들다. 대학생 김동욱(25) 씨는 "대학 게시판에 종종 대자보가 붙지만 학생회에서 형식적으로 행사를 공지하는 정도일 뿐이다. 대학 게시판이라고 해서 다른 게시판에 비해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공공장소에만 있던 게시판은 아예 개인의 도구로 변모하고 있다. 인간 게시판인 '1인 시위'가 유행하고 있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1인 시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방식인 1인 시위는 입법기관 등 주변 100m 이내에서 2인 이상 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의 법망을 피하기 위해 처음 시도됐다. 경찰과 마찰을 빚을 이유도, 집회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기 때문.

그러면서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개성 표현을 중요시하는 젊은 세대의 사회적 발언 형식으로 선호되고 있다는 얘기다. 반값 등록금 실현, 20대 투표 참여 등을 독려하는 1인 시위를 정기적으로 펼치며 유명 인사가 된 김인(24'계명대 한국어문학과 3학년) 씨는 "여러 사람을 모아야 하는 집회에 비해 1인 시위는 손쉽게 실행할 수 있다. 또 딱딱하고 무거운 구호 대신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구호로 재미있게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1인 시위는 젊은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1인 미디어와 같은 맥락에 있다. 블로그나 SNS는 검색을 통해 수많은 네티즌들에게 자기 의견을 노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1인 시위도 유동인구가 많은 거리에서 자기 의견을 효과적으로 노출할 수 있기 때문에 시도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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