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재생불량성 빈혈과 싸우는 박정화 씨

가난이 원수, 조직 맞는 제대혈 찾았으나…

가난과 질병, 외로움. 이 모든 것은 한꺼번에 박정화(56
가난과 질병, 외로움. 이 모든 것은 한꺼번에 박정화(56'여) 씨를 찾아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그의 곁에는 항상 이웃이 있었다. 13일 오후 대구의 한 대학병원에서 박 씨의 이웃인 백선영(51'여) 씨가 그를 위로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찢어진 가정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돌아간 곳은 결국 고향이었다. 박정화(56'여) 씨는 2002년 남편과 이혼 도장을 찍은 뒤 도망치듯 고향 경북 청도로 갔다. 짐이라고 해봤자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마음의 짐은 눈에 보이는 짐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빈손으로 터덜터덜 고향으로 내려왔을 땐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혼자가 익숙해졌을 때쯤 잊고 지냈던 병이 재발했다. 박 씨는 지금 '재생불량성 빈혈'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꿈이 큰 여자

박 씨의 웃음소리는 호탕했고 표정은 밝았다. 오른쪽 가슴에 박혀 있는 주삿바늘만 보지 않았다면 환자라고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웃음보다 눈물이 많은 삶이었지만 내색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박 씨가 걸린 '재생불량성 빈혈'은 골수 조직이 지방으로 바뀌면서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이 감소하는 혈액질환이다. 정기적으로 피를 수혈하지 않으면 몸속에 철분이 계속 쌓여 당뇨를 비롯한 합병증에 얻을 수 있다.

젊은 시절 그는 외로움을 모르고 지냈다. 20대 초반부터 10년 넘게 청도군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그는 1980년대 중반 공무원증을 반납했다. 여자들은 대부분 결혼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시절이었지만 박 씨에게는 결혼이 아닌 다른 꿈이 있었다. "꿈이 컸어요. 내 손으로 사업을 일궈 돈도 많이 벌어보고 싶었고요. 그래서 군청에 사표를 내고 여태까지 모은 돈으로 사업을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첫 사업은 테니스장이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이 열린 뒤 한국에서 테니스 인기가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테니스는 상류층의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었다. 테니스장을 만들고, 코치를 섭외해 관심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특별 레슨을 했다. 특별 레슨 한 번에 5만원이나 했지만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주변에서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핀잔을 줘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박 씨는 삶을 즐기면 그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테니스장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관공서와 학교에서 테니스장을 무료로 주민들에게 개방하면서 사설 테니스장 사업은 외면받았다. 사업을 시작한 지 6년 만에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결혼의 상처

1994년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박 씨의 나이는 30대 후반이었다. 초혼을 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고 박 씨는 중매로 두 아이가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는 아이들이 좋았다.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 도시락을 싸주면 아이들은 "새엄마가 싸줬다"며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애들을 처음 만났을 때 큰애가 중학교 1학년,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어도 내 자식처럼 가슴으로 품어 키웠어요." 하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과 불화로 결혼 9년 만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8년간 정을 줬던 가정을 떠날 때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남편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졌던 연을 단칼에 끊어내자 가슴에도 멍이 들었다. 몇 년 전에는 결혼을 앞둔 딸이 박 씨를 보고 싶어 했지만 그는 차마 결혼식장에 가지 못하고 혼자 눈물만 흘렸다.

빈손으로 고향인 청도로 내려왔을 때는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그가 결혼을 한 지 2년이 채 안 돼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집은 낡을 대로 낡아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이제 삶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남편과 자녀를 위해 살았던 지난 9년을 가슴에 묻고 박 씨는 식당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어머니의 죽음, 결혼의 상처가 아물어갈 때쯤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18년 전 재생불량성 빈혈 진단을 받고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잘 지냈으나 혼자 살며 건강을 챙기지 못하자 병세가 악화된 것이다. 박 씨는 2010년 10월부터 한 달에 한두 차례씩 대구의 한 대학병원을 방문해 수혈을 받다가 지난달 병원에 입원했다.

◆이웃의 정

가난과 질병, 외로움.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박 씨를 찾아왔다. 인생의 낭떠러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스스로 교회를 찾아가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었다. "나를 붙잡아 달라"고 신에게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때 박 씨의 곁을 지켜준 것은 이웃들이었다. "청도에서 대구 병원까지 한번 가려면 왕복 2시간이 넘는 길을 왔다갔다해야 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차로 나를 데려다 줘요. 동네 사람들이 다 내 보호자예요."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박 씨는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다. 백선영(51'여) 씨는 "박 씨가 위험하다"는 전화를 받고 밤중에도 한걸음에 대구로 달려오는 고마운 이웃이다.

재생불량성 빈혈을 치료하려면 조직이 일치하는 제대혈을 이식해야 한다. 박 씨는 얼마 전 자신과 맞는 제대혈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제는 항상 돈이다. 박 씨는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에 1천200만원을 납부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식을 망설이고 있다. 사글세 170만원짜리 방에 살며 틈틈이 이웃 김밥 가게에서 일해 버는 수입으로는 이식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박 씨는 지금 또 다른 이웃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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