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지구는 좌절의 별이다

지구는 좌절의 별이다. 독일 언론인, 볼프 슈나이더가 쓴 '위대한 패배자'란 책의 첫 문장이다.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않을 터이다. 이 강렬한 서문(序文)에 사로잡혀 도서관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가 던진 이 메타포(metaphor'은유)는 부정하기 힘들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런던올림픽만 하더라도 전체 메달 수는 900여 개에 불과했다. 참가선수 1만여 명 가운데 채 10%가 안 되는 숫자만이 땀의 대가를 보상받았다. 나머지는? '당연히' 좌절이다.

물론 시상대에 올라선 메달리스트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쳐지는 것은 아니다. 꼴찌에게도 박수와 격려가 쏟아진다. 이번 올림픽이 내건 슬로건도 '세대에게 영감을'(Inspire a Generation)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귀가 따갑게 들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격언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뿐인 것도 사실이다. 패배자들에게 보내는 관심은 늘 찰나적(刹那的)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냉정한 것일까? 갖지 못한 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예의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독설일까? 개그콘서트 '불편한 진실'에서 왜 다루지않는지 모르겠다.

실상 약자들이나 패배자들에게 - 특히 그럴 듯한 스토리가 있는 경우에- 잠시나마 열광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다. 이른바 '언더도그(underdog) 효과'다. 힘센 '오버도그'(overdog)보다 패배가 뻔한 쪽을 응원하는 연민이다.

정치인들은 이 같은 대중의 선한(?) 심성을 파고 든다. 패배자이자 약자일 수밖에 없는 다수에게 '여러분과 같은 처지'라며 다가선다. 대선에 나선 여야 각 정당의 주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통합당 김두관 경선 후보의 슬로건은 '국민 아래 김두관'이다. 그럼 '국민 위'에는? 답은 상상하는 대로다.

새누리당 경선에 나섰던 후보들도 마찬가지였다. 김문수 후보는 홍보동영상 '남과 여'를 통해 노동운동가 출신인 자신과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 후보를 대비시켰다. 김태호 후보는 '소장수의 아들'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미운 오리새끼'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오버도그'로 몰린 박 후보조차도 언더도그 효과를 기대한다. 민주통합당 이종걸 의원의 막말 파문에 새누리당은 내심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문제는 '약자는 약하기 때문에 선하고, 강자는 강하기 때문에 나쁘다'는 잘못된 선입견이 확산되는 것이다. 최근 재벌 총수에 대한 법원의 이례적 중형(重刑) 선고나 대선 핵심 이슈인 '경제민주화' 등이 자칫 포퓰리즘으로 흐를까 우려된다. 온갖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선거판에서 유권자들이 논리적, 이성적 판단을 하기는 사실 쉽지않은 일이다.

이제 120일 뒤면 대한민국의 5년을 이끌 지도자가 선출된다. 대권을 움켜쥔 그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은 모두 패배자로 남는다. 남은 과제는 '위대한 패배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과에 승복할 줄 모르는 패배자는 재도전의 기회조차 잡지 못한다는 건 역사의 증명이다. 승자가 '반대 세력을 최소화하고, 지지 세력을 최대화'(minimizing enemies,maximizing friends)하는 데 나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위대한 패배자'에서 작가는 "좋은 패배자란 느긋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라고 썼다. 이 말에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개, 저 안에 천둥 몇개, 저 안에 벼락 몇개'라는 시 구절도 덧붙이고 싶다. 장석주 시인의 시(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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