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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백일장] 깻잎을 세다가/의리의 땡땡이/우연찮게/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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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1-깻잎을 세다가

벌초 다녀온 남편이 풋고추며 깻잎을 가져왔다. 일전에 지인이 주신 깻잎과 한데 섞어서 훌훌 씻었다. 새들새들하던 것이 물을 만나자 순식간에 푸슬푸슬 살아나서 밭으로 도로 갈 기세다. 숨죽었던 것이 살아나니까 부피 또한 대단하게 불어났다. 안 그래도 채소 값이 비싼 요즘이라 깻잎김치라도 담그자고 생각했다. 싱크대에 서서 한 장씩 간추리고 있으려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귀찮은 일거리가 되었다. 한 장 한 장 오른손으로 물기를 털어서 왼손에다 올려놓는 단순작업에 슬슬 꾀가 났다. 그 틈을 타고 '지폐를 세는 거라면 얼마나 좋으랴', 괜히 엉뚱한 헛생각이 고개를 치켜드는 게 아닌가. 한 소쿠리의 넓적한 깻잎이 정말로 지폐였다면 간추리는 동작도 빨라졌을 테고 세는 맛은 또 얼마나 달콤하겠는가.

애들이 집에 있을 땐 특히 아들이 대학 다니던 시기에는 아침마다 시퍼런 것 한 닢만 달라고 두꺼비 손을 내밀곤 했다. 버스 값, 점심 값인 것을 알면서도 '아껴 써' 소리를 몇 번이나 했다. 돌아보면 참 잠깐인 것을 왜 그렇게 깍쟁이처럼 굴었을까 싶지만 지금도 애들한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아껴 쓰란 소리다. 나는 '버는 자랑 말고 쓰는 자랑 하라'는 옛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런 말 하면 애들은 엄마가 할머니 같다고 싫어하지만 파장의 장사꾼처럼 손가락에 마른침 묻혀가며 설렘으로 돈다발을 세어본 기억이 없으니 돈은 늘 부족한 존재다. 결혼 초에 받던 월급봉투는 얇아서 셀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봉투 받던 날은 세고 또 세고 해도 지겹지가 않았다. 그때 세던 만원권의 힘은 정말 대단했는데 그도 세월 앞에선 장사가 못 되는 것 같다.

이제 그만 남은 깻잎이나 마저 간추려서 간장에 담가야겠다.

김채영(대구 북구 태전동)

♥수필2-의리의 땡땡이

30년 전 쯤, 은실아! 너 기억나니? 중학교 다니던 그때, 뜬금없이 같이 조퇴해 달라고 이야기 했던 것! 한 참 의리가 최고라는 정신으로 학교를 다녔던 나는 당연히 함께 조퇴를 신청했지. 한 놈은 아팠고 한 놈은 부축해야 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땡땡이를 쳤었지.

난 너 혼자 보냈다간 무단횡단을 할 것처럼 보였기에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너를 따라갔지.

우울 비슷한 표정으로 바닷가로 향한 넌 한참 아무 말 없이 파도만 쳐다보았지. 비를 흠뻑 맞으며 아마도 넌 그 빗속에서 울었지. 그런데 은실아! 그 후 또 그런 일이 있었다.

고3 어느 날, 성적 걱정을 자주하던 전교 여 부회장이 또 뜬금없이 같이 조퇴를 해 달라고 하잖아. 이유도 묻지 말고 조퇴증을 끊어 달라고 선생님을 협박하다시피해 땡땡이를 쳤었다. 혼자 보내면 어디에서 뛰어 내릴 것 같았거든. 그 때도 어디 가는 지 묻지 않았고 우울 비슷한 표정으로 버스를 타는 친구를 따라 어느 성당에 들어갔어. 빈 성당에 들어가더니 기도를 하며 한 시간을 울더라. 난 그냥 아무 말도 않고 바라보고 기다렸다. 중학교 때 아무 말 없이 우울하게 파도만 쳐다보는 널 뒤에서 바라보았듯이 말이야.

한순금(대구 수성구 노변동)

♥시1-우연찮게

우연찮게

오늘

채소가게를 지나다 비름나물을 만났다

이 비름나물 얼마예요?

이런, 내가 물어 보렸는데, 비름나물

쯧쯧

우연찮게

그때

옆 가게의 '굴비 한 두릅 만 원'을 봤다

고래 안 써 있음

굴비 한 두름 주소, 하렸는데

쯧쯧

기분을 살짝 망쳤다

정말, 우연찮게

서현숙(대구 수성구 만촌2동)

♥시2-등산

봄 여름 가을 겨울

산은 서로 다른 표정과 몸짓으로 나를 부른다.

봄이면 삶이 용솟음치는 희망

여름이면 풍성한 초록

가을이면 알찬 결실의 오색 빛깔

겨울이면 흰 빛의 참된 의미를 스스로 거두는

산의 사계

나를 위하여 남을 해치지 아니하고

이파리 하나 어긋남 없이

순서로운 평화

눈비에 씻기는 대로 바람에 흔들리는 대로

그 자리에 그렇게 우뚝한 산

더도 덜도 아닌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영원한 철학을 만나기 위해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산을 오른다.

민창기(영천시 대창면)

지난주 선정되신 분은 남효정(김해시 삼계동) 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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