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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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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에도 동백꽃은 활짝 피었다. 다른 꽃들의 목소리가 컸던 지난여름에 그는 홀로 숨어 지냈다.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같이 누릴 수 없었던 여름을, 한꺼번에 느끼려고 작정이나 한 듯 단숨에 피워낸다.

동백꽃은 꽃잎이 별안간 모가지째 '툭' 떨어진다. 마치 단두대나 교수형으로 고개를 떨구어 버린 사형수가 그러하듯이. 날개만 있으면 날아갈 수 있다고 누가 손짓했단 말인가. 그를 자유로운 죽음의 세계로 이끄는 또 다른 손길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아이를 만난 건 얼마 전이다. 소녀가장이라고 소개받았을 때만 해도 너무 씩씩해서 이 아이에게 내가 과연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눈이 매력적이네'라며 말을 건네는 나에게 '저는 원래 예쁘거든요.' 자신만만한 대답으로 나를 안심시켜 주었던 아이다. 가장이라는 자리가 나이 어린 소녀를 저토록 어른스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인가. 작은 체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믿음직스러웠다. 그늘도 없었다.

그 아이가 세상을 마감하겠다고 약을 먹었다. 얼마 전 만났을 때만 해도 주중에 일하는 것도 모자라 주말에까지 알바를 구했다고 자랑하던 그다. 버스 요금을 아끼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몇 구간을 걸어 다닌다고도 했다. 빨리 저금해서 세탁기도 한 대 장만하겠다며 가장 가까운 희망을 얘기하기도 했다.

내가 그 아이를 알기 전까지는 삶의 막다른 골목을 느끼지 못했다. 거리에 술 먹고 쓰러져 있는 노동자 같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 사람은 왜 저리 사는가를 비웃었다. 그 사람인들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어 거리에 쓰러지고 싶었겠는가. 우린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자연의 역동성과 절제성을 과학자들은 '가이아의 이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 무차별로 적용되는 약육강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베스와 블루길이 되어 힘없고 약한 붕어들을 먹어 치우지 않았는가. 큰 것에 먹히는 붕어 잉어를 자연의 억제력이라고 방관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침대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얀 시트만 구겨놓은 문종이처럼 떠들썩하게 얹혀 있다. 병치레로 끝도 없이 누워있는 엄마,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쥐어지는 게 없는 아빠, 아직 철없이 손 벌리는 동생이 그를 더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은 것 같다.

그녀에겐 세상이 모두 등을 보인 채 돌아 서 있는 것 같았을 것이다. 차마 한마디 원망도 해보지 못한 채, 곤두박질치듯이 처박혀 버렸다. 이 아이가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단 말인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시간에 자기 몸을 던져버렸다.

동백꽃이 마당에 하나 가득 떨어져 있는 아침이다. 문득 한 송이를 집어 볼에 대어본다.

고윤자<수필가·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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