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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눈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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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집 근처엔 크지 않은 도서관이 하나 있다. 내가 이 동네로 이사 오면서부터 가끔씩 이용하는 곳이다.

이 도서관엘 몇 번째 드나들었을 땐가, 나는 도서관 분위기엔 영 맞지 않는 한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행색은 '촌티' 바로 그 자체였다. 바글바글 소리가 날 것같이 짧고 자잘하게 볶은 파마머리, 어느 오일장에서나 산 듯한 얇은 몸빼 바지에 하늘색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서 있기만 해도 줄줄 땀이 흐르던 폭서, 그 더위를 피해 냉방이 잘 되어 있는 도서관엘 왔나 싶었다. 절룩거리며 현관문을 들어서는 할머니는 몹시 헉헉거렸다. 그러면서 현관에 놓인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곧이어 부시럭부시럭 약봉지를 펼쳐 흰 가루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할머니의 모든 행동으로 봐서는 도무지 책을 읽으러 온 사람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의외의 광경이 벌어졌다. 할머니는 불편한 수족을 끌며 열람실 책장 쪽으로 가 주섬주섬 몇 권의 책을 들고 왔다. 그러더니 오로지 읽기에만 열중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읽던 책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보다 책 읽는 그 노인의 모습이 낯설어 호기심이 당겼던 것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꼼짝 않고 두세 시간을 앉아 배겼다. 할머니의 그 '공부'가 참 놀랍고 신기했다. 그후로 나는 일부러라도 가끔 도서관에 들렀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마다, 할머니는 여전히 당신 자리에 앉아 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 도서관 사서가 들려준 이야기인데, 할머니는 이제 막 한글을 깨우쳤다는 것이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근처 중앙시장 난전에서 생선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거동이 많이 불편해 잠시 쉬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서 아가씨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해주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 이 도서관에 동화책 100권을 기증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처음엔 동화책 등을 읽더니 지금은 이런저런 문학잡지나 소설, 수필집, 시집 따위를 가져와 무조건 그렇게 책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한 번은 내가 "할머니 재미 있으세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왜 물어보는지 다 안다는 듯 빙긋 웃으며 "그냥 무턱대고 읽는 거여, 무슨 말인지는 잘 몰러도 글자가 요래 신기할 줄은 몰렀지. 그저 읽으마 기분이 좋아져"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문맹의 할머니에겐, 글자를 읽어 당신에게 일어나는 그 반응을 소리없이 곱씹어 먹는 재미, 그것만 해도 암흑에서 눈뜬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정작 할머니의 행색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한 선입견, 그 무지몽매한 나의 '촌티'를 부끄러워했다.

석미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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