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美여권 운동 선구자 루크레티아 모트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루크레티아 코핀은 큰 좌절감을 맛보았다. 의욕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 교사들이 받는 봉급의 절반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여성의 권리에 대해 관심을 둔 코핀은 엘리자베스 케이티 스탠턴과 함께 미국 여권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평생 한결같이 개혁 운동을 벌였다.

1793년 오늘 태어난 코핀은 19세에 같은 학교의 교사였던 제임스 모트와 결혼해 노예제도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노예제도 반대 운동에서조차 성 차별은 여전했다. 반노예제도 집회에 참석하려다 여자라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한 모트는 1848년에 스탠턴과 함께 뉴욕에서 '여성의 사회적'시민적'종교적 권리를 토의하기 위한 집회'를 열었다. 여권 신장을 위한 최초의 집회였다. 이날 독립선언서를 본떠 "모든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로 시작하는 선언문이 발표됐다.

모트는 2년 후 '여성론'을 발표하고 그해에 도주노예법이 통과되고 나서 도망 노예들에게 자신의 집을 피난처로 제공했다. 이후 각종 집회를 주도하는가 하면 강연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남북전쟁 후에는 여권 신장과 함께 해방노예들의 투표권과 교육 기회를 얻으려고 애썼다. 1880년, 87세의 나이로 숨졌다.

김지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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