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공약 이행이 뜨거운 감자가 됐다. 공약을 지키자니 재원 마련이 문제고 안 지키자니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리는 꼴이다. 발을 담그고 있으면 머잖아 나라의 곳간이 거덜난다고 한다. 그렇다고 발을 빼면 약속은 꼭 지킨다는 정치인 박근혜의 곧은 이미지가 훼손될까 걱정이다.
과거 어느 대통령도 공약을 다 지킨 경우는 없다. 누구나 당선되고 나면 공약(公約)은 그야말로 공약(空約)이 되기 일쑤였다. 국민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통령 중간평가제 도입을 공약했지만 흐지부지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공약 이행률이 낙제점 수준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반도 대운하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4대강 사업으로 변질됐다. 당락을 좌우할 정도의 핵심 공약들이 물거품이 된 것은 다반사다.
외국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일본 민주당은 지난 2009년 고속도로 무료 통행, 휘발유세 폐지 등 원화로 약 228조 원이 들어가는 공약을 내걸어 집권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정권 내내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미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는 자신의 패배 원인으로 주저 없이 버락 오바마가 특정 집단에 쏟아부은 '선심성' 공약을 들었다. 오죽하면 "선거 때 내놓은 공약을 다 지키면 미국을 확실히 망하게 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박근혜 당선인도 이번 선거 기간 많은 공약을 내걸었다. 특히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은 두 배라든가, 100%, 반값이라는 등의 구체적인 수식어가 붙은 공약들이다. 재정을 책임져야 할 해당 정부 기관들은 당초 새누리당이 제시했던 예산보다 수배의 예산이 들어갈 것이라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세금 들어오는 것은 한정돼 있고 쓸 곳은 태산인데 그 많은 돈을 어디서 고아내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세금을 더 쥐어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통령직 인수위 측은 '실현 가능성과 재원 마련 가능성 등에 대해 충분히 논의해 진정성을 갖고 하나하나 정성껏 마련한 것들'인데 무슨 소리냐고 압박하고 있다. 정성을 다해 만든 대선 공약을 지키지 마라, 폐기하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박 당선인 스스로도 '공약을 발표할 때 그것을 만든 분들이 피곤할 정도로 따지고 또 따졌다'고 밝히며 공약 이행에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 당선인이 공약을 다 지킬까 봐 걱정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박 당선인이 평소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다 보니 이런 우려가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당선인의 공약 가운데는 그대로 이행하는 것이 무리인 공약이 분명 있다. 선거일이 임박하면 덜컥 약속부터 하고 보는 것이 우리나라의 선거 풍토다. 지난 선거 기간에도 이런 공약들이 적잖게 있었다. 기획재정부는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내건 공약 이행 소요 금액을 사전 검증하려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선거법 위반 논란에 휩싸이면서 무산됐다.
정치인이라면 공약을 지켜야 하는 것이 도리다. 공약은 정치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자산이다. 특히 박 당선인이라면 공약 이행을 더없이 소중한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박 당선인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공약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미래 선거 문화를 바꾸는 초석을 깔 수도 있다.
대통령 선거 기간 나온 공약들이 분명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박 당선인이 공약을 한 개도 빼놓지 않고 자구대로 이행하려 든다면 미생지신(尾生之信'고지식해 융통성이 없음)의 화가 될까 염려된다. 국민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것들도 있다. 공약 이행이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나온다면 한 박자 늦춰야 하는 이유다.
아직 새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지 않았다. 취임 전 공약 이행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잘된 일이다. 당선인 박근혜와 대통령 박근혜는 같은 듯하지만 다를 것이다. 상당수 공약은 취임 후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다시 한 번 검증하고 이행할 수 있다. 감자가 뜨거울 때는 식혀 먹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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