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7월 초순, 일본 유학 중이던 성악가 세 사람이 당시 조선일보 주최 음악회에 초청을 받아 출연하게 되는데, 이때 윤건혁도 김안라, 김영일, 장비 등과 함께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미 윤건혁의 일본 데뷔 사실을 알고 있던 서울의 빅터레코드사는 작곡가 전수린을 앞세워 서둘러 윤건혁과 전속계약을 맺습니다. 이렇게 하여 윤건혁은 아예 서울에 머물며 빅터레코드사 전속가수로서 새로운 삶의 출발을 하게 됩니다.
1936년은 윤건혁이 이규남이란 이름으로 서울에서 대중 가수로서의 첫 데뷔를 했던 해입니다. 가수 이규남은 빅터레코드 전속이 되어서 1936년 한 해 동안 무려 19곡의 유행가 가요작품을 발표합니다. '고달픈 신세'가 데뷔곡이었고 '봄비 오는 밤''나그네 사랑' 등이 바로 그 곡목들입니다. 이러한 노래의 작사를 맡은 사람들은 강남월, 고마부, 전우영, 홍희명, 고파영, 김팔련, 김벽호 등입니다. 이규남 노래의 작곡은 대부분 전수린과 나소운이 맡았습니다.
여기서 나소운(羅素雲)이란 이름을 각별히 확인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나소운이란 바로 너무도 유명한 작곡가이자 수필가였던 홍난파(본명 홍영후'1898∼1941) 또 다른 예명이지요. 홍난파는 대중음악 작품을 발표할 때 나소운이란 예명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규남의 노래에 특별히 다수의 작곡을 맡은 까닭은 홍난파가 서양음악을 전공하던 후배 이규남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규남은 1937년에도 빅터사에서 약 스무 편가량의 가요작품을 취입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이 유행가 작품이었고, 신민요 작품도 더러 있었지요. 일본 빅터사에서는 이규남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가 그해 7월에 '미나미 구니오'(南邦雄)란 일본 이름으로 유행가 '젊은 마도로스'를 발표해 일본의 가요 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규남은 1940년까지 빅터사에서 수십 편의 가요작품을 취입 발표합니다.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이 시기에 이규남이 '골목의 오전 7시''눅거리 음식점' 등과 같은 만요를 발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이규남의 창법과 음색의 특징이 광범한 보편성을 지녔고, 어떤 노래를 취입해도 대개 잘 소화를 시켰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1941년, 이규남은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겨서 드디어 신가요 '진주라 천리 길'(이가실 작사'이운정 작곡, 콜럼비아 40875)을 발표합니다.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진주라 천리 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 가에 외로이 피리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 노래를 불러본다
나라의 주권을 잃고, 군국주의 체제의 시달림 속에서 허덕이는 식민지 백성들은 이 노래 한 곡으로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서러움과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 작품은 분단 이후 줄곧 금지곡 목록에 들어 있었는데, 그 까닭은 작사자, 작곡가, 가수 모두 북으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이가실은 당대 최고의 작사가 조명암의 또 다른 필명이요, 이운정은 작곡가 이면상의 예명입니다. 일제 말에 인기가 높았던 이규남은 이후 친일가요를 취입하는 일에 강제동원이 되었습니다.
1950년 이규남은 북으로 가서 내무성 예술단 소속으로 가수로서의 활동을 이어갑니다. 북한에서는 작곡과 무대예술 분야에서도 새로운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가요사 자료는 1974년에 이규남이 사망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남과 북은 갈라져 있지만 '진주라 천리 길'의 애절한 가락과 여운은 지금도 우리 귀에 잔잔히 남아있습니다. 햇살이 따뜻한 봄날, 진주 촉석루를 다정한 벗들과 함께 찾아가서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남강의 푸른 물결을 내려다보면서 이 노래의 한 소절을 잔잔히 불러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이동순(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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