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세 시대 은퇴의 재발견] <1부>새로운 출발 ⑥황혼전쟁(상)

"돈 못 벌어주면 찬밥신세 서울" vs "여자도 집안일 은퇴하고 싶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단둘이 제2의 신혼을 맞이할 것 같은 은퇴부부들. 하지만 그들 대개는 오늘도 전쟁 중이다. 집안일에서 은퇴하고 싶은 아내와 은퇴 후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서로에게 상처 주며 긴긴 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다.

이른바 황혼전쟁. 집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가부장적인 태도를 고집하는 남편과 '오래된 가치'에 더 이상 순종하지 않으려는 아내와의 숨 막히는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분을 못 이긴 아내들은 은퇴한 남편을 두고 매일 거실에서 시간을 죽인다 하여 '공포의 거실남', 하루 종일 잠옷 차림으로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를 몰래 엿듣는다 하여 '파자마맨', 떼려야 떨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에서부터 세 끼 집에서 식사하는 '삼식이', 여기에 간식까지 줘야 하는 '종간나'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희화화한 농담으로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하소연한다.

남편들은 스스로를 강아지보다 못한 처지라고 한숨지으며, 이사하는 날 버림당하지 않을 '행동요령'을 입에 올리면서 신세 한탄이다.

한국에도 일본처럼 '공항의 이별'이 급격히 늘고 있다. 막내아이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보낸 뒤 공항에서 갈라서는 나리타공항의 이별이 어느새 우리의 현실이 돼 버린 것이다. 2012년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황혼이혼이 전체 이혼의 23.8%를 차지, 이혼 4건 중 1건이 황혼부부였다.

◆지난해 은퇴한 59세 김씨

"모두들 은퇴하면 찬밥 신세라고 했지만 나만은 '왕의 귀환'이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엄마편이고 아내도 처음에는 밥도 잘 차려주고 신경을 쓰는 것 같더니 한두 달 지나니까 노골적으로 귀찮아합니다. '밖으로 나갈 일 없느냐' '뭐라도 배워보라'고 눈치를 주며 나를 밖으로 내몰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갈 곳이 없고 만날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 만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주 괴롭습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던 회사도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자식들은 나를 투명인간처럼 취급합니다. 열정을 쏟았던 회사에서 나라는 존재는 언제 어느 때라도 교체할 수 있는 부속품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돈 못 벌어주는 남편은 짐짝 같은 존재라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결국 나는 가족을 위해 '돈 벌어주는 기계'였고 회사에서는 언젠가 용도 폐기될 그런 '소모품'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얻겠다고 몸 상해가며 그렇게 발버둥치며 매달렸는지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말 것을.

바보처럼 살아온 겁니다. 이런 마음을 아내에게 이야기하면 위로받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내는 "당신만 고생한 거 아니다. 나도 힘들었다"며 내 말은 들어줄 생각도 않고 자기 이야기만 마구 쏘아댑니다. 속이 뒤집힐 노릇입니다. 가족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지고 사표를 내고 싶을 때도 꾹 참고 살아온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고 불쌍합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우리 아버지만큼 대접도 못 받고 이렇게 찬밥 신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식들도 엄마랑 똘똘 뭉쳐 나를 공격해 대니 사방이 적입니다. 나한테는 우군 하나 없습니다.

아내의 불만스러운 이야기를 듣다 보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큰 죄를 지은 것이었어요. 어느새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고 잘못한 사람이 돼 있더라는 말입니다. 참 기가 막힐 뿐입니다."

◆50대 중반의 아내

"물론 남편 그동안 고생했지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지만 나는 그동안 놀았습니까. 아이 키우고 집안 살림 혼자 다했습니다. 바쁘다며 내가 아픈지 아이가 아픈지 관심 없이 살아온 남편입니다. 그런데 퇴직하고 나니 자기 몸 조금만 아프면 '꿀물 태워 달라' '무슨 음식이 좋다던데'라며 하루 종일 이것저것 요구합니다. 내가 아플 때 이마라도 한번 짚어주었다면 왜 내가 이러겠습니까. 내가 힘들어할 때 손잡고 '고맙다' '수고한다'는 말 한마디만 해주었어도 이토록 서운함이 크지 않았을 겁니다. 남편이 불쌍하다가도 그 마음이 싹 움츠러들어요.

평생 부엌 근처 얼씬 안 하던 남편을 설거지나 청소시키는 거 나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늦게 올 때면 밥이라도 알아서 챙겨 먹으면 좋지 않습니까. 계속 전화해서 '언제 오느냐'고 물을 때면 울컥합니다. 나는 언제 부엌에서, 또 아내라는 직업에서 은퇴할 수 있을까요. 나도 은퇴하고 싶습니다. 맨날 이렇게 밥만 하다가 내 인생이 끝나는 겁니까.

내가 정말 필요할 때는 친구와 약속이다, 일 약속도 그렇게 많더니 진작 필요 없을 때는 집 밖으로 나가질 않는 겁니다. 하루 종일 집에 앉아서 '반찬이 맛이 없니 전기를 마구잡이로 쓰니'라며 잔소리가 이어집니다. 나도 이제 자유롭고 싶습니다. 도자기도 배우고 친구들과 좋은 곳도 가고 싶습니다. 이게 잘못입니까. 자식들 뒤치다꺼리 겨우 끝내고 자유롭게 살게 되었구나 생각했는데, 이젠 남편을 아이처럼 돌봐야 하다니 평생 나는 없고 가족들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내가 불쌍해요.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뒤통수에다 대고 뭐라는지 아십니까. '매일 어딜 그렇게 쏘다녀. 얼굴에 화장하는 것처럼 집안도 좀 깨끗하게 해보시지'라고 소리쳐요. 정말…."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그림:화가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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