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일제 저항 아나키스트, 철학자 하기락

'한 손에 실존적 자유의 깃발을/다른 손에 인간적 해방의 깃발을/높이 쳐들고/일생을 통한 뜨거운 열정으로/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어울러/이 나라 현대철학의 제1세대 학자로서/최고봉을 이루셨던 분/이곳 안의 출신의 허유 하기락 선생이시다.'

1912년 경남 함양군 안의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1997년 어제 생을 마감한 허유(虛有) 하기락(河岐洛) 박사는 아나키스트 활동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일제엔 저항도 마다치 않았다. 1929년 광주학생 사건 연루로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졸업반에서 퇴학 돼 경성 중앙고보에 편·입학, 1933년 겨우 졸업했다. 졸업 후 밀항, 일본 동경 상지대 예과 수료 뒤 와세다대학에 진학했다. 유학으로 그는 아나키스트의 길로 들어섰고 항일 정신은 여전했다. 그는 와세다대학 한인동창회 모임에서 창씨개명과 조선말 사용금지 등 일제 조선정책을 비판했다. 1939년 오늘 붙잡혀 옥고를 치렀고 1945년 광복 후 한국농민조합장에 당선돼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1946년 4월엔 고향에서 전국 아나키스트대회를 열고 권력의 지방분산 등을 촉구했다.

1963년엔 경북대에서 설립된 한국 칸트학회(현 대한철학회) 회장을 맡는 등 한국철학계의 선구였다. 1989년엔 국제아나키스트연맹 한국대표도 지냈다. 영남대'경북대'계명대 교수 등으로 대구가 주무대였지만 학덕비는 고향(안의 공원)에 세워졌다.

정인열<서울지사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