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친일행적 논란 여성 정치인 박순천

여성 정치인 박순천(朴順天). 그는 1919년 3·1운동 때 마산에서 시위를 벌이다 일제에 붙잡혀 풀려난 뒤 도피생활을 하던 중에 '순천댁'(順天宅)이란 별칭을 썼다. 이것이 굳어져 세인들에겐 본명 '명련'(命蓮)보다 더 익은 이름이 됐다. 1919년 가을 기녀로 가장해 일본에 건너가 도쿄 요시오카(吉岡) 여자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3·1운동과 관련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내로 다시 압송돼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감옥을 나온 뒤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니혼(日本)여자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도쿄 유학생과 결혼하고 경북지역 농촌에서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는 항일 독립활동을 벌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해 신탁통치반대운동에 나섰고 1947년엔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고, 1948년에는 '부인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1949년 오늘 창립된 여성문화연구소의 총재가 됐고, 대한여자청년단 단장도 맡았다.

특히 대한부인회 총본부 회장을 6년간이나 이끌며 19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2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이후 4·5·6·7대까지 5선을 지냈고 민주당 총재와 민중당 당수에 오르는 등 대표 여성 정치인이 됐다. 화려한 경력이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인 1943년 3월 여학생들에 대한 정신대 종용사실 등 뒤늦게 밝혀진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됐다.

정인열<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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