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과 테니스를 함께 치면서 머리를 깎아주는 보람으로 살고 있어요."
대구 수성구 범어공원 내 구림테니스장. 코트 한쪽에 있는 휴식 장소인 조그만 조립식 건물 안에는 매일 사랑의 가위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사가 커트 보를 씌운 어르신의 머리를 깎느라 손놀림이 분주하다. 싹~ 싹~.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인 이발사는 가위질하는 손길에 정성과 진지함이 가득하다. 어르신은 머리를 깎은 뒤 거울을 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남겼다. 이발사는 다른 어르신 2명의 머리를 더 깎은 뒤 가위질을 멈췄다. 이발사는 땅에 흩어진 머리를 쓸어 청소까지 깔끔하게 했다. 이 이발 봉사의 주인공은 장수건(71) 씨. 그는 구림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는 어르신을 대상으로 10년 넘게 이발 봉사를 하고 있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그는 매일 집에서 나오면서 가방에 테니스 라켓과 이발도구를 함께 챙겨오는 게 습관이 됐다. 그는 어르신들과 함께 오전에 테니스를 즐긴 뒤 매일 어르신 4, 5명의 머리를 손질해주고 있다. 테니스장 어르신들은 그를 '장 이발사'로 부른다.
"테니스장에 나오시는 어르신들의 터부룩한 머리는 그냥 두고 못 봐요. 이런 어르신은 데리고 와 머리를 깔끔하게 잘라줘야 직성이 풀려요."
구림테니스장 이용 어르신은 4개 클럽 40여 명. 나이는 대부분 70, 80대로 노익장을 자랑한다. 그도 테니스 실력은 중간 정도급이지만 몸은 날렵하고 탄탄해 보인다. 테니스장에 나오는 어르신들은 장 이발사에게 한 달에 한 번은 이발 서비스를 받는다. 어르신들은 "테니스도 치면서 머리도 깎을 수 있어 너무 좋다"며 "장 이발사는 말수는 적은데 의리가 강하고 농담을 해도 즐겁게 받아주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장 이발사는 오랫동안 어르신 머리를 깎다 보니 헤어스타일도 모두 파악하고 있을 정도다. 그는 손재주가 많아 테니스장 전기, 급수 시설 가설 등도 도맡고 있다.
그의 삶은 이발 봉사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여 년간 KT에서 현장 선로작업을 했던 그는 근무 당시 가위손을 자처해 직장 동료들의 이발을 책임졌다. 군 생활 동안 상사나 동료들의 머리를 깎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고 한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머리 깎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6'25전쟁 때 미군들한테 이발도구를 우연히 얻어 머리를 깎다 보니 이발사 아닌 이발사가 돼 지금껏 이발 봉사를 하고 있지요."
이 밖에도 그는 들꽃봉사단 회원으로 매달 두 번씩 복지시설을 찾아 가위손 봉사를 하고 있다. 애망원의 장애아동과 보훈병원의 어르신들에게 이발 봉사를 10년째 하고 있는 것. 특히 그는 거동을 못 하는 상이용사 가정을 방문해 수시로 머리손질을 해주고 있다. 또 동구 신암3동 노인회관에도 매달 방문해 어르신 이발을 해주고 있다. 그는 재능봉사단체인 나눔봉사회가 이달 11일 서구 감삼공원에서 개최하는 어르신 초청 봄맞이 자선음악회에도 동참해 어르신 머리손질을 해줄 계획이다.
"나의 작은 봉사가 바이러스처럼 퍼졌으면 해요. 서로 재능을 조금씩 나누면 사회가 더욱 밝아지지 않을까요."
김동석기자 dotory1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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