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전 대구 동구 효목초교 인근 문방구. 입구 앞에 놓인 2개의 평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평상 위에 설치된 천막에 걸린 젖은 수건 2개만이 문방구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문방구 앞 나무 평상은 아이들에게 '신세계'였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볼펜과 학용품, 로봇, 과자, 달고나, 뽑기 등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날 상점 안 진열대에 올려둔 실로폰, 멜로디언 상자는 모두 빈 상자였다. 빈 상자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막기 위한 '햇빛 가리개' 대용이었다. 이곳 문방구 주인은 "재고 처리하기도 버거워서 새 제품을 들인 지가 한참 됐다"며 "문구점이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모습이 옛 풍경이 된 지 오래다"고 말했다.
◆사라지는 문방구'서점
동네 아이들의 '문화 놀이터'이자 '사랑방'이었던 동네 문방구와 서점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대구시에 따르면 2002년 대구지역 1천197개에 달했던 문구 소매점은 2011년 771개로 줄었다. 같은 기간 449개였던 서점도 점점 줄어 2011년에는 271개만이 남았다.
대구 동구 효목동 문방구와 서점 업주들에 따르면 10년 전만 해도 효목초교 주변에는 소규모 문방구와 서점이 3~5개 있었다. 효목동에서 10년 넘게 서점과 문구점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유영학(62) 씨는 "예전에는 한 동네에 서점이 3개 이상이었는데 이젠 한 구에 1개만 운영될 정도로 소규모 서점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며 "대규모 사무용품이나 학용품, 책은 인터넷이나 대형마트에서 구매하는 경우가 많아지다 보니 동네 서점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소규모 문방구와 서점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은 대형 사무용품업체와 대형마트, 인터넷 서점 등 대형 상점들이 속속 나타나면서부터다. 효목초교 주변에도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소규모 문방구와 서점들이 설 자리를 조금씩 잃어갔다. 문방구로 빼곡했던 효목초교 앞은 이제 영어'수학'피아노 학원들로 바뀌었다.
3년 전 시행된 정부의 '학습준비물 지원제도'로 인해 한 차례 더 타격을 받았다. 학습준비물 지원제도는 맞벌이 부부의 학습준비물 준비의 어려움을 덜고 저소득층 학부모의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행된 제도다. 대구시 교육청은 올해 총 47억2천800여만원을 들여 학생 1인당 3만5천원씩 지원하고 있다. 각 학교는 교육청에서 지원받은 예산으로 '최저가 입찰제도'를 통해 준비물을 구매하고 있다.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는 대형 문구센터 앞에서 소규모 문방구와 서점은 당할 재간이 없다.
◆문구점 살길 열어줘야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추진하고 있는 '어린이 식생활 안전관리 특별법 개정안'은 소규모 문방구점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고 있다. 식약처는 오는 6월 '학교 주변 200m 내에 있는 문방구점 식품 판매 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개정안을 제출할 방침이다.
'학습준비물 지원제도'로 뚫린 수입 구멍을 과자, 음료수 등 식품 판매 수입으로 겨우 막고 있는 문방구점에 '불량 식품 근절'은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6년 동안 효목초교 앞에서 문방구를 운영하고 있는 김인숙(52'여) 씨는 3년 전 20㎡ 규모의 문방구를 반으로 나눴다. 달고나, 슬러시, 떡볶이 등의 즉석조리 제품은 문방구에서 팔 수 없기 때문이다. 김 씨는 어쩔 수 없이 문방구를 반으로 나눠 한쪽은 분식집으로, 한쪽은 문방구로 운영하고 있다. 김 씨는 "온종일 있어도 공책 한 권 사가는 날이 없을 때도 많다"며 "이름만 문방구이지 어린이 기호 식품 판매로 근근이 수입을 얻고 있는데 이마저도 못하게 하면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학습준비물 생산유통인협회와 경제민주화국민운동본부, 전국유통상인연합회 등은 지난달 27일 국회 앞에 모여 "전국 중소 문구 생산인, 유통인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학습준비물 생산유통인협회 이성원 사무국장은 "동네 문방구가 골목에서 모두 사라지면 학생들은 연필 한 자루를 사기 위해 대형마트를 찾아가야 한다"며 "문방구는 규제돼야 할 대상이 아니라 대형마트로부터 보호돼야 할 대상이다. 정부는 문구를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지정해 문구점들의 살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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