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머리, 꽃집 이름이 예뻐 발길을 옮겨놓곤 합니다. 일전, 마침 지나가는 길이라 선뜻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분갈이를 하던 주인의 반김조차 읽을 새 없이 문간에 놓인 제라늄 꽃분 앞에서 눈을 멈춥니다. 수수한 진초록 꽃줄기 끝에 피어난 흰 것과 빨강, 노랑, 연분홍, 진보라…. 내가 만난 가장 오래된 화분 속의 꽃인 만큼 친숙한데도 화색이 그렇게 다양한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유년기, 시골 약방 집 햇살 바른 청마루에서 한 줄기 제라늄을 처음 보았지요. 그땐 참 낯설고 생경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온 산천이 모두 놀이의 무대이던 나에게 꽃은 마땅히 뜨락이나 돌담 밑, 혹은 산과 들녘에서 자라는 풀꽃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옥내에서, 그것도 야생의 것과 다른 꽃을 본 나는 아마도 신기했던가 봅니다.
꽃집 주인이 두충잎 차를 달여 내 놓습니다. 작은 공간에 풀 비린내 같은 녹향이 가득 풍깁니다. "제라늄이 이렇게도 종류가 많네?" "그럼요, 10가지가 넘습니다."
"요즘도 제라늄을 좋아하는 고객이 많은가요. 꽃도 유행을 탄다던데?"
"꾸준히 선호도가 높은 꽃이 제라늄입니다. 까탈스럽지 않거든요. 여름뿐만 아니라 사철 내내 쉬지 않고 마디마디 꽃을 보여줍니다. 햇살이 좋고 지나치게 건조하지만 않으면 잘 자랍니다. 꺾꽂이를 해도 착근이 빠르고요."
그래서 그는 제라늄을 좋아한다면서 자신이 느끼는 꽃 온도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꽃에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온도를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느낌은 비슷한지 꾸준하게 잘 팔려나가는 꽃이 제라늄이라고 덧붙입니다. 하나의 풀꽃에서 감정온도를 느낀다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꽃과 무관한 한 분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달포 전, 내 고향 길목의 Y요양원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중증장애인이 요양할 수 있는 사회복지 시설이지요. 이순을 넘었다지만 소녀같이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는 ㅈ씨가 나를 안내 합니다. 원내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있는데 장난감을 만지고 놀던 장애아동들이 ㅈ씨의 치마폭을 꼭 잡고 매달립니다. 뭐라 표정을 짓고 손놀림을 하지만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ㅈ씨는 그들과 편안하게 소통합니다. 웃음소리로 마주하고 끊임없이 칭찬과 격려의 시그널을 보내줍니다. 가슴을 끌어안고 연신 볼을 비빕니다. 나는 그의 손길과 눈빛이 유별나게 따뜻해 보여 경이롭게 쳐다봅니다. 그도 한 중증장애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정상인으로서 장애인을 돌보고 치료한다는 단(壇) 위의 자신이 아니라, 그들 속에서 함께 동거하며, 그 스스로 재활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행동이 참 특별해 보였습니다. 원장인 그의 사명감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왠지 부족할 만큼.
갓 스물이 되던 어느 여름날, 두꺼운 겨울이불로 에워싼 기아(棄兒)를 끌어안고 대구의 아동보호소를 찾았던 것이 사회복지 일과 인연이 되었다는 그는 분명히 나보다 가슴이 더운 사람입니다. 그의 손길과 얼굴에선 감사와 평화의 미소가 흐르고 모성에서 우러난 온기가 몸을 감싸 흘러내립니다. 나는 그에게 '36.5도 플러스'라며 엄지를 치켜세워 경의를 표합니다.
사람은 두 가지 온도를 동시에 지닙니다. 체온과 다른 가슴 온도가 있지요. 내 것이되 내가 잴 수 없는 온도 말입니다. 정밀한 체온계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가슴 온도는 주변 사람들이 재고 그 온도는 그들만이 느낍니다. 내 가슴 온도에 따라 그들이 보내오는 눈빛이 달라지지요.
가슴이 다순 사람을 만나면 내가 금방 그 온도에 동화되어버립니다. 설익은 나를 그대로 내보여도 창피하다거나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힘을 얻게 되지요.
당신은 36.5도 플러스입니다. 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주는 봄비처럼 뭇 생명의 호흡을 촉진해 줄 사랑스러운 분입니다. 우리 모두 가슴 온도를 올려 보아요. 온정과 미담으로 수놓은 길 따라 동해처럼 청푸른 물결 출렁거릴 테니까요. 서로 기대면서 삶의 고단을 어루만져 줄 테니까요.
마치 제라늄꽃처럼 까탈스럽게 굴지도 않으면서 변함없이 아름다운 꽃을 보여주는,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한 꽃의 온도를 느끼며 즐겨 찾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김정식/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 gasan3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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