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은 어느 길로 가든 구불구불 2차로를 달려야 한다. 한적한 시골길은 사람도, 차도 많지 않으니 답답한 느낌이 없다. 길을 막는 신호등이 없고, 영양을 관통하는 반변천을 따라 깎아지른 절벽이 끊임없이 이어지니 눈이 심심할 틈도 없다. 불편한 교통 탓에 '육지 속의 섬'이 됐지만 맑은 물과 상쾌한 공기, 아름다운 숲이 고스란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온몸의 감각을 열고 영양의 때묻지 않은 자연을 잠시, 조금이나마 느껴보기로 했다.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대티골 숲길
'치유의 길'로 이름 붙은 일월면 용화리 대티골 숲길을 걷기로 했다. 일월산 자락의 원시림과 투명한 계곡의 물소리, 소나무 향기 짙은 고요한 숲길은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용화리로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 4번이 전부다. 어스름하게 동트는 오전 6시 40분. 버스 승객은 혼자뿐이다. 일월산 자생화공원까지 30여 분 동안 버스는 숨 고를 새 없이 달리기만 했다.
출발점인 일월산 자생화공원은 1939년 일제가 광물 수탈을 위해 만든 선광장이자 제련소다. 선광장은 해안 진지처럼 시커먼 굴이 숭숭 뚫려 있었다. 선광장 옆으로 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공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밭 한가운데 여기저기 부스러진 용화리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
마을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좁은 오솔길은 국도를 머리 위로 두고 계속 이어진다. 낯선 이방인에 놀란 새들이 소나무 사이로 날며 부산을 떨었다. 무아교를 지나면 아랫대티 마을이 나오고 선녀탕골을 지나면 '아름다운 숲길' 입구에 도착한다. 대티골 숲길은 윗대티 마을에서 시작한다. 윗대티마을을 거쳐 옛마을길과 칡밭길을 거쳐 진등과 옛 국도길, 아름다운 숲길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숲길 초입에서 큰골 삼거리에 이르는 구간은 숲길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숲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돌에 부딪혀 돌아드는 계곡 물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마른 솔잎이 쌓인 숲길은 양탄자처럼 푹신하다. 큰길삼거리를 지나면 좁은 오솔길이 이어진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나무의자와 그네가 설치돼 있어 숨을 돌리기도 좋다. 옛마을길에서 칡밭목이 표지판을 지나면 반변천의 발원지인 뿌리샘을 만난다. 좁은 굴 속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줄기는 109㎞를 굽이굽이 돌아 낙동강과 합류한다.
오르락내리락 걸으면 칡밭목삼거리와 옛 31번 국도다. 일월산의 동쪽 자락을 뚫은 옛 국도길은 일제가 일월광업소에서 캐낸 광물을 봉화로 실어나르기 위해 만든 길이었다. 영양터널이 생긴 뒤에 통행이 끊어졌고, 좁은 길에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졌다. 지금은 '영양 28㎞'라는 표지판만이 흔적으로 남았을 뿐이다.
◆주실마을과 조지훈 시인
윗대티 주차장에서 오전 10시 45분 버스를 타고 일월면 도계리 일월삼거리에서 내렸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로 가기 위해서다. 5분 전 버스를 놓친 상황. 꼼짝없이 길 위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오후 1시 20분 버스를 타고 주실마을에 도착하니 고작 7분이 걸린다.
노거수가 우거진 '시인의 숲'을 지나면 너른 논 뒤편으로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실마을을 만난다. 이 마을은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과 입향조인 호은공의 증손자 옥천 조덕린의 옥천종택이 있다. 조선 영조 때 건립한 월록서당도 잘 보존돼 있다. 지훈 문학관과 지훈 시공원도 둘러볼 만하다.
주실마을은 풍수지리상 배의 모양이란다. 이 때문에 배에 구멍이 난다며 마을 안에 우물을 함부로 파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40년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개천 주변에 웅덩이를 파서 식수로 썼다. 호은종택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학자가 많이 나온다는 정삼각형의 '문필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의 집들도 대부분 문필봉을 마주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영남 지역의 개화를 선도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토박이인 조석걸 문화관광해설사는 "조선 후기에는 실학자들과 교류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남녀노소 신교육을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1928년부터 양력설을 쇠고 있다. 지금도 제사나 윷놀이, 세배, 떡국 등 설날 세시풍속을 신정에 즐긴다"고 했다.
호은종택 앞에서 조동훈(78) 씨와 마주쳤다. 조지훈 시인의 8촌 동생이라 했다. 조 씨는 조지훈 생전에 인연을 맺은 몇 안 되는 친척이다. "서울에서 철도고교 입학시험을 쳤다가 떨어지고 귀향하려는데 형님이 동성고로 가라고 해요. 입학해 보니 형님이 새 국어교사로 오셨더라고. 나를 입학시켜주는 조건으로 국어교사를 한 거예요." 당시 조지훈 시인은 고려대 국문과 교수였다. "박목월 시인이 몸이 아픈 형님 대신 수업에 들어와서는 '너 때문에 형님은 병나고 나는 이게 뭔 꼴이냐'고 하는 바람에 전교에 소문이 났죠."
조 씨는 "조지훈 선생은 늘 손바닥 만하게 종이를 잘라서 갖고 다니면서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바로 적어 정리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조지훈 시인은 청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우스갯소리를 섞어 쉽게 설명해서 인기가 많았어요. 혜화동에 있던 우석대 강당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강연을 했는데 호응이 엄청났죠."
술 심부름을 하던 시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술 심부름, 참 많이 했습니다. 조지훈 선생이 살던 서울 성북동에서 삼성교까지 500m 정도 돼요. 삼성교에 있던 막걸리 집에서 술을 사다 날라야 되는데 못 배기겠더라고. 바케스에 들고 하룻밤에 7, 8번은 가야 되거든. 바케스 버리고 도망도 가고, '아프다' '집에 없다' 온갖 핑계를 대도 소용이 없었어요. 하하."
◆용이 놀다 간 금강소나무 숲
다음날 오전 6시 40분 영양읍에서 수비면 본신리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금강소나무 군락지인 본신리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을 찾아가는 길이다. 전날 밤에 내린 봄비로 반변천에는 누런 흙탕물이 흘렀다. 한티재(해발 430m)를 넘어가는 길은 좁고 아슬아슬했다. 수비면을 지나 검마산자연휴양림을 지나 하천을 건너면 왼쪽에 야영장이 보인다.
금강소나무 생태경영림은 본신리와 수하리, 신원리 일대 3천461㏊에 금강소나무 숲을 조림하고 생태계 복원과 탐방로, 편의시설 등을 마련한 곳이다. 금강소나무는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하다. 기후와 생장 조건 때문이다. 금강소나무는 땅속 양분이 적고 겨울이 긴 지역에 서식한다. 생장 속도는 더디지만 조직은 단단하게 여문다. 동해안 지역의 잦은 눈으로 인한 무게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나무 모양도 삐죽한 형태가 됐다.
이곳에는 산림생태 숲 탐방로 6개 코스가 개설돼 있다. 등산로와 비슷한 탐방로 대신에 어도 쪽으로 난 징검다리를 건너 야생화 탐방로를 산책하는 것도 좋다. 1시간 코스인 생태탐방 5코스를 걸었다. 도로 건너편 산림청 연수동을 지나 소나무 사이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마른 솔잎을 밟는 느낌이 꽤 부드럽다. 30여 분가량 오른 뒤에 산허리를 감고 도는 오솔길을 지나 내려오면 된다.
오전 11시 버스를 타고 수비면 발리리 면 소재지로 돌아왔다. 시계 수리와 도장 제작을 하는 '오케-사'에서 발길이 멈췄다. 문을 여니 '끄르륵' 거친 마찰음을 낸다. 한쪽 벽에는 수십 년은 됐을 법한 고장 난 라디오와 앰프가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썼다. 선반에는 20년은 묵은 듯한 카세트테이프가 가득했다. 멀겋게 색이 바랜 '심형래 코믹노래 음반' 표지에서 20대의 젊은 심형래가 웃고 있다. 모서리가 반들반들한 나무 작업대 위에는 끊어진 시곗줄과 10여 종류의 드라이버, 눈에 끼우는 확대경과 돋보기 안경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오케-사' 주인 권오경(75) 씨는 서울의 한미종합기술학교에선 시계 고치는 기술을, 대구의 경안당에서는 도장 파는 기술을 배워 1964년 가게를 열었다. '오케-사'는 자신의 영문 이름의 이니셜에서 따왔고 'OK', 좋다는 의미도 담았다.
권 씨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그도 한때 '극장주'였다. 권 씨는 1970년대 초에 가게 맞은편에 있던 극장을 사들여 이른 저녁에는 텔레비전을 틀고, 오후 8시부터 영화를 한 편씩 상영했다. 자동차에 확성기를 달아 '왱왱'거리며 영화 홍보도 했다. 가게 앞에는 대형 스피커를 내고 하루 종일 음악을 틀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가게 앞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보급되며 극장 손님이 줄었고, 시내버스가 다니면서 수비면 5일장도 사라졌다. "아쉬울 것도. 후회도 없어요. 그냥 한 시절 잘 놀았던 거죠. 저는 앞으로도 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을 겁니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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