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새 숭례문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연합군은 서울 폭격을 계획했다. 기선을 제압해 상륙작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소식은 당시 주일공사 김용주의 귀에도 들어갔다. 김 공사는 이를 듣자마자 곧바로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을 찾았다. 무차별 폭격이 진행될 경우 숭례문(남대문)을 비롯한 600년 도읍지의 문화유산이 깡그리 날아갈 상황. 김 공사는 맥아더를 설득했다. "오랜 역사가 흐르는 동안 여러 위기에서 보존된 문화재가 폭격에 파괴되어 버린다면 한국엔 더 이상 문화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김 공사는 맥아더로부터 문화재 보존 약속을 얻어냈다.

미군의 서울 폭격은 9월 9일부터 13일까지 무려 5일간 계속됐다. 서울 시가지는 온통 무너진 건물 잔해로 뒤덮였다. 하지만 숭례문은 폐허 더미 속에 우뚝 솟아 있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숭례문은 1962년 국보 1호로 지정됐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숭례문 2층 누각에서 불이 났다. 경기도 고양시에 살던 채모 씨가 숭례문에 불을 지른 것이다. 소방차가 진화에 나섰지만 불길을 잡기는 어려웠다. 불은 삽시간에 번져 발화 5시간 만에 누각을 받치고 있던 석축만 남긴 채 숭례문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온갖 재난과 전쟁 속에서도 600년을 넘게 버텨온 숭례문이 잿더미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화마에 스러졌던 숭례문이 5년 3개월 만에 복구돼 국보 1호 자리로 돌아온다. 연인원 3만 5천 명이 복구에 동원됐고 276억 7천만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25t 트럭 28대분의 나무와 15t 트럭 236대 분량의 돌이 사용됐다. 용마루의 길이는 늘었고 1층 추녀마루의 머리를 장식하는 잡상은 8개에서 7개로 줄었다. 화재 당시 바닥에 떨어져 뒹군 덕택에 화를 면했던 숭례문 현판은 중앙에 세로로 내걸린다. 한국전쟁 때 망가져 임시로 복구했던 이 현판은 조선시대 탁본을 구해 원래 필체의 모습을 되찾았다.

국보 1호 숭례문이 복구됐다지만 원래의 모습은 찾을 길 없다. 4일 복구 기념식을 앞두고 옛 숭례문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은 오간 데 없고 새 숭례문에 대한 찬사만 나열되고 있다. 문화유산을 만드는 데는 1천 년이 걸리지만 이를 허무는 데는 하루도 안 걸린다. 새로 들어선 숭례문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또 다른 500년 세월이 필요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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