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중소기업들이 제도의 희생양이 되는 사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중소기업 우대 정책을 내세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대기업 우선 정책에 밀려나곤 했다. 박근혜정부도 중소기업 현안을 우선 정책으로 내세웠지만 현장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는 기류가 우세하다. 중소기업법률지원센터 주성영 소장은 "중소기업이 겪는 어려움을 사례별로 해결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중소기업을 강소기업, 대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정부의 의지와 중소기업인을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다.
◆"기술 좋아도 전문기업 안 되네요"
16일 오전 경북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대한특수금속㈜ 공장. 쇳물이 끓는 용광로와 쾅쾅대는 기계 소음들. 여느 주물 공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이지만 이곳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현장 곳곳에 터치 스크린이 장착된 PC가 있고 공장 중앙에는 PC들을 통제하는 '상황실'까지 있다. 중소 주물공장으로는 드물게 전 공정에 IT를 접목시켰다. 자동차와 선박용 부품을 생산하는 이 회사는 2000년 기업 내 통합정보 시스템인 'ERP'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3개의 생산 라인을 모두 전산화했다. 온도 측정과 조형, 페인트칠에 이르는 전 공정을 현장 직원이 PC에 직접 입력하면 전산실에서 이를 관리해 제품 정확도를 높인다.
하지만 이 업체는 최근 큰 좌절감을 맛봤다. 30년간 뿌리산업에 종사했다는 자부심과 IT 기술 결합으로 높아진 품질을 무기로 지난해 중소기업청의 '뿌리산업 전문기업'에 도전했다. 하지만 2단계 '온라인 자가진단 평가'에서 탈락해 신청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기술력보다 기업의 재무 상태를 중시하는 평가 항목 때문이다. 총자산 순수익률과 부채비율 가중치는 각 4점. 하지만 핵심뿌리기술 보유 가중치는 1점에 불과했다. 송영선 부장은 "핵심뿌리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키운다는 취지가 무색하게 기업 부채 정도와 총자산 수익률을 더 중요시해 마치 은행 대출 심사와 같았다"고 주장했다.
이 회사의 기술력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전 생산 공정에 전자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국제품질관리인증(ISO9002)을 획득했고, 2009년에는 국제 자동차 산업 분야의 품질보증체제인 TS16949도 땄다. 수출이 쉽지 않은 업종이지만 미국 자동차 부품업체인 메탈다인과 싱가포르의 선박 부품업체에도 납품을 하고 있다. 2010년 기술연구소까지 설립해 제품 경쟁력을 높인 결과였다. 송 부장은 "3D 산업인 금속 주조업은 인력난이 심하다. 직원들의 자부심도 높이고 미래 인력도 끌어들이기 위해 전문기업을 따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도 취지에 맞게 기술과 품질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것이 대한특수금속 측의 주장이다. "우리 회사처럼 대를 이어 30년 넘게 뿌리산업에 종사하며 기술력을 인정받은 업체들이 전문기업 신청 요건 자체가 안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뿌리기업의 재무 평가가 기술력보다 더 중요합니까?" 현장 사정을 모르는 제도 때문에 업체들은 속으로 눈물만 흘리고 있다.
◆매년 사채 끌어쓰는 건설업체, 이유는?
경북에서 20년째 A건설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이명철(가명'54) 대표. 그는 지난해 어김없이 사채 업자에게 2억원을 빌렸다. 두 달간 이 돈을 빌리는 데 낸 이자만 2천만원.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연말 자본금 예치 제도' 때문. 건실한 건설업체를 육성해 부실시공을 막겠다는 정부의 목표에 따라 이 제도가 도입됐다. 철제 도로표지판 같은 금속구조물 전문 건설업체인 A업체는 연말마다 2억500만원을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60일간 '증명'해야 한다. 관급 공사를 입찰받은 대형 건설업체의 하청업체인 A업체에는 큰 금액이다. 게다가 원청업체에서 공사 대금을 제때 주지 않자 매년 고리로 사채를 빌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 대표는 "이 제도는 하청업체엔 독"이라고 잘라 말했다.
대형 건설업체는 보유한 면허 개수가 많아 예치 금액도 그만큼 많다. 12월 31일 전후로 20억원 정도를 60일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관급 공사 대금을 받아놓고 연말이 지나도 하청업체에 공사비를 주지 않는 원청업체가 허다하다. 만약 이때 자본금을 증명하지 못하면 자격 미달로 영업정지 처분을 받거나 다음해 공사 수주를 받지 못하게 되니 사채 같은 '위험한 돈'을 빌려서 돌려막는 것. "대기업 건설사는 이런 자본금에 구애받지 않아요. 대구경북 건설업체는 대부분 3군 업체인데 자기네 자본금 채우는 게 먼저니 하청업체에 돈을 제때 주지 않아요." 지난해 연말까지 못 받은 공사 대금이 9억원. 이 대표는 "'자본금 증명 기간이 끝나면 주겠다'고 한 업체에서 아직도 못 받은 대금이 2억원이나 된다"고 한숨지었다.
이 제도를 악용한 브로커들도 기승을 부린다. 매년 11월이 되면 사무실 팩스는 쉴 새 없이 종이를 뿜어낸다. '자본금을 증명해줄 테니 이자 내고 돈 빌리라'는 브로커들의 광고가 대부분이다. 하루에 수십 통씩 걸려오는 광고 전화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 정도다. 보통 이자는 1억원을 두 달 빌리는 데 1천만원 선이다. 정체불명의 브로커들에게 사기를 당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선이자를 내면 돈을 바로 입금시켜 주겠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영세 건설업체에 접근한 뒤 이자만 받고 종적을 감추는 식이다. 그는 "지역의 작은 건설사들 여럿이 사기를 당했다. 사기 위험을 무릅쓰면서 돈 빌리는 사람들 심정이 어떻겠느냐"고 털어놨다. 실제 올해 2월 건설사 57곳에서 이런 수법으로 14억여원을 선이자로 받아 가로챈 혐의로 50대 남성이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제도는 현실과 겉돌고 있다. 2011년 당시 국토해양부는 자본금 증명 기간을 30일에서 60일로 오히려 늘렸다. 사채처럼 단기 자금으로 일시적으로 자본금 기준을 충족하는 편법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변경된 제도 때문에 영세업체들은 이자 부담만 더 떠안게 됐다. 그는 "예치 기간만 늘린다고 해서 없는 돈이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니 돈 빌리는 기간만 늘어난다. 만약 이 제도를 없앨 수 없다면 예치 기간을 평달 중 60일로 정해 돈이 연말에 한꺼번에 몰리지 않도록 하면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했다.
◆"이중관세 때문에 이중고"
자동차 문과 본체를 연결하는 신지조립기를 생산하는 성서산업단지 내 자동차부품 제조회사인 C사. 연매출 650억원에 직원 240여 명인 이 회사는 탄탄한 기술력으로 국내외 자동차 생산업체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C사는 지난해 중국 상하이 인근의 해외법인 내에 설치됐던 설비를 국내로 들여왔다. 2006년 중국 공장을 준공해 프레스, 조립, 도장, 용접까지 모두 해결하다가 지난해부터 프레스 공정을 국내에서 하기로 했다. 중국의 인건비와 환율이 상승해 현지보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이 이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회사는 대당 5천만~2억원 상당의 프레스 7대를 국내에 들여왔다. 2006년 국내 공장에서 중국으로 내보냈던 프레스를 고스란히 국내로 들여오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고액의 관세가 문제였다. 2006년 중국으로 반출할 때 현지에서 상당액의 관세를 납부했는데도 지난해 국내로 반입할 때 다시 1억원 상당의 관세를 납부해야 했다. 업체 측은 이중관세라며 관세청을 상대로 이의를 제기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다. 관세법상 이중관세를 물도록 엄격하게 정해놨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글로벌 경영 시대에는 공장이 설치된 국가의 경영 정책에 따라 설비를 외국으로 반출 또는 국내 반입이 자주 발생하고, 회사도 경영 정책이 수시로 바뀐다"며 "이럴 때마다 이중관세를 물어야 하는 현 제도에서는 중소기업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글로벌 경영 시대에 맞게 관세법도 현실에 맞춰 개정해야 한다"고 했다.
기획취재팀=이창환기자 lc156@msnet.co.kr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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